“동양의 理는 서양의 신과 같은 절대적 실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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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호 08면

주자학은 무신론인가. 대체로 그렇게들 알고 있다. 그렇지만 가령 『주자어류』를 펼치면 우리는 전혀 다른 목소리와 마주친다. “천지가 있기 이전에 이 이(理)가 있었다. 이가 있어 천지가 있게 되었다. 이것이 없었다면, 천지도 없었을 것이고, 사람도 사물도 없었을 것이고, 땅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이가 있어 기(氣)가 흘러가기(流行) 시작했고, 만물을 발육하게 되었다.”(未有天地之先, 畢竟也只是理. 有此理, 便有此天地. 若無此理, 便亦無天地, 無人無物, 都無該載了. 有理, 便有氣流行, 發育萬物.)

한형조 교수의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퇴계 그 은둔의 유학 <11> - 라이프니츠의 주자학 해석

“그리스 철학보다 기독교 신학에 가깝다”
흡사 창세기의 한 구절을 읽는 듯하지 않은가. 퇴계는 고봉 기대승과 논쟁하던 와중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理)는 텅 비어 있으면서 가득 차 있고, 절대적 무(無)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유(有)입니다. 움직이면서도 움직이지 않고, 멈추되 멈춤이 없으며, 지극히 순수하여 한 터럭도 덜거나 뺄 수 없습니다. 음양오행과 만사만물의 근본이되 그 물질에 제약되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 절대적 존재를) 기(氣)와 뒤섞어 하나로 반죽할 수 있습니까.”

사단칠정론의 핵심에 이 절대적 존재의 독립성과 초월성이 자리 잡고 있다. 이(理)의 이 같은 위상을 간파한 서양의 철학자가 있다. 라이프니츠는 『중국인의 자연신학』에서 말한다. “중국인들의 이(理)는 우리가 신(Deus)이라는 이름으로 숭배하는 그러한 절대적 실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당시 롱고바르디 등 선교사들은 이(理)가 “영혼도 생명도 없고, 섭리도 지성도 없는” 수동적 제1원리 ‘materia prima’라고 생각했다. 라이프니츠는 즉각 반발했다. “그건 당대 중국 관료들의 세속적 견해를 옮긴 것일 뿐 이(理)의 진정한 함의는 아닙니다. 중국인들이 아무런 능력도 생명도 의식도 지성도 없는 자연물에 그렇게 고상한 속성을 부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기(氣)가 이(理)의 도구라면 결국 이(理)에는 힘 또는 최초의 동력인 ‘la vertu ou la causa effiente’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우주를 창조하고 지배하는 절대자의 인식을 공유하는 점에서, 즉 “자연신학 ‘natural theology’의 완정한 체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의 철학은 고대 그리스인의 철학보다 훨씬 더 기독교 신학에 가깝다”고 그는 썼다.

선교사와 서신 교환만으로 얻은 통찰
이 발언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분이 많겠다. 이제까지 둘 사이는 그야말로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 얼음과 불처럼 서로 어울릴 수 없이 대치해 오지 않았던가. 그동안 기독교는 복음의 전파를 위해 중국을 이교도의 나라로 치부했고, 유교도들 또한 스스로를 상식과 합리의 지평 위에 정초함으로써 정체성을 보존하고자 했다. 18세기 이래 지속된 이 대치로 하여 주자학의 유신론적 종교적 지평은 점차 잊혀져 갔다.

나는 이 망각이 아이로니컬하게도 유교의 동력을 쇠잔시켰다고 생각한다. 원두(源頭)를 잃어버림으로써 유교는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르게 되었고, 중심이 없어 활로의 타개도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어쨌거나 라이프니츠의 주자학 이해는 경이롭다. 중국 현지에서 보낸 보고서와 선교사들과의 서신 교환만으로 어떻게 그 같은 통찰에 이르게 된 것일까. 더구나 롱고바르디나 생트 마리가 주자학의 핵심을 오해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지적할 수 있었을까. 한국의 속담대로 ‘서울 가 본 사람보다 안 가 본 사람이 우기는’ 격이 아닌가.

라이프니츠는 어느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오늘날 기독교 학자들이 유대인들보다 히브리의 고대 저서들을 더 잘 해석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역시나 오래 들여다본다고 텍스트를 더 잘 이해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전문가를 자처하지도 않거니와, 마이크를 잡고 “이 분야의 전문가로서…”라고 서두를 떼는 사람의 말은 대강 흘려듣는 버릇을 갖고 있다.

동서를 아우르는 사유의 지평
주자학의 신학적 지평은 그동안 우리가 간과해 온, 혹은 오해해 온 여러 논점을 읽는 데 주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1) 하나는 철학적 논쟁의 기반이다. 사단칠정 논쟁에서 조선 후기 인간과 동물성의 동이(同異)를 두고 벌인 오랜 논쟁까지 그 핵심에 절대적 존재의 위상과 힘에 대한 이견이 자리 잡고 있다. 거칠게 단순화하자면 퇴계의 주리(主理)는 신학적 노선 위에서 영육의 갈등을 넘어서고자 했고, 율곡의 주기(主氣)는 과학적 인식에서 사회적 합리성을 달성하고자 했다.

2) 하나는 유교와 서학의 관계다. 조선 후기 신부도 없이 한역(漢譯)된 텍스트만으로 자생적 가톨릭 교단을 형성한 그 내적 동력은 지금 보듯이 주자학이다. 또 다산의 혁신적 상제(上帝)신학을 두고 유교냐 가톨릭이냐를 논란하고 있지만 그의 사유는 유교 신학의 극단화로 볼 수 있고, 이 토양은 퇴계의 주리(主理)에서 잉육되어 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3) 하나는 동서양의 사유가 가진 공유 지평이다. 문화와 습속의 차이를 지나 언어의 이질감을 덜어내면 문제와 접근, 그 해결까지 서로 빼닮은 것이 많다. 그 활간(活看)에 기반해 동서를 뭉뚱그린 사유의 지형을 그리고 타이폴로지를 만들어 볼 수 있겠다 싶다. 적대감이 낯섦과 이질감에서 온다면 이 작업이 상호 간 이해를 넓히고 관용을 증진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와 더불어 전선이 달라질 것이다. 가령 동양과 서양이 아니라 위기(爲己)와 위인(爲人), 혹은 존재와 소외 등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전한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주희에서 정약용으로』『조선유학의 거장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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