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비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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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호 02면

여덟 살 난 둘째 딸아이는 자기가 왜 울었는지 끝내 말하지 않았습니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 밤 TV에서 영화 ‘워낭소리’를 보고 난 직후였습니다.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달구지를 끄는 늙은 소, 자신 역시 발을 심하게 다쳤으면서도 오히려 소를 위해 짐을 덜어 주는 할아버지, 천수를 다한 소를 땅에 묻고 길 옆에 덩그마니 앉아있던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사진)….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엉엉 소리 내 울던 아이의 마음속에는 노동, 우정, 소통, 배려, 희생, 죽음, 상실 같은 묵직한 관념들이 마구 뒤섞여 흘러갔겠죠. 마음이 먹먹해 대답을 못했을 겝니다.

올 상반기 300만 명에 육박하는 관객을 동원한 대박 독립영화 ‘워낭소리’가 이번 추석 특집 영화 중 가장 높은 시청률(9.8%)을 기록했다죠. 연휴를 마치고 나오니 마침 ‘워낭소리’의 뒷얘기를 담은 동명의 책(인디스토리 엮음, 링거스그룹 펴냄)이 출간됐더군요. 이충렬 감독이 밝힌 소회 중 이 대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임했으니 작품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동안 쌓아 왔던 것을 모두 버리고자 했다. 할아버지와 소의 걸음처럼 느릿하게 덧셈이 아닌 뺄셈으로 가보자 했다. 따져 보면 이제껏 내가 실패했던 이유 역시 그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꾸만 보태고 쌓고 보여 주려고 하다 보니 차다 못해 넘쳐 버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101쪽)

경북 봉화에서 촬영을 시작한 것이 2004년 겨울이니 3년 넘게 찍어 놓은 분량이 얼마나 많았겠습니다. 하지만 감독은 욕심을 버렸습니다. 할아버지와 소만 남겨놓았죠. 그 여백에 관객들은 각자 느낀 감정을 마음껏 풀어 놓을 수 있었습니다. 여덟 살 꼬마까지 말이죠. 비우는 것, 버리는 것의 힘이랄까요. 역시, 비워야 채워지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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