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평론' 통해 본 한국 좌파 현주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한국의 '좌파' 가 다시 모여 최근 진보적 학술지 계간 '진보평론' (대표 김진균.손호철.최갑수) 을 펴냈다 ( '현장에서 미래를' 刊) .사회적인 관심 속에 선보인 '진보평론' (창간특집 : 맑스주의의 오늘과 내일) 의 내용을 통해 한국 좌파의 자화상을 짚는 자리를 이진우 교수의 글을 통해 마련했다.

마르크스가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사회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슴을 두 쪽으로 갈라놓았던 이념갈등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던 좌파들이 다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 이념의 정치적 실현을 도모하였던 현존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 되어버렸으며 또 냉전의 장벽이 가로질렀던 곳은 이미 신자유주의의 건축물로 뒤덮여 있다.

베를린 장벽은 인간다운 삶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지 다시 세워져야 할 것이 결코 아니라면, 마르크스가 복귀한 데는 분명 특수한 이유가 있을 터이다.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철저하게 비판한 마르크스는 여전히 우리의 동시대인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변혁이론과 사회관계를 모색하기 위하여 창간된 '진보평론' 은 이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해체와 증발의 위기에 봉착했던 좌파지식인들은 IMF 경제위기로 다시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국제금융 관리체제의 여파로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고, 이러한 대량실업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라는 점은 우리의 머리를 차갑게 만든다.

전세계를 적나라한 경쟁의 도가니로 만들어 놓는 신자유주의의 공세가 거세질수록 이 문명의 야만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과 희망의 비전에 대한 요구 역시 더욱 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이런 점에서 '진보평론' 의 출간은 우선 고무적이다.

아무런 방향도 없이 자동적으로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자본주의의 물결에 익사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인간다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정치적 이상을 필요로 한다.

특히 마르크시즘의 거대이론이 타당성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동경마저 사라져버렸다는 포스트모던한 진단을 뒤집는 일은 긴요하다.

우리가 오랫동안 뜸들였던 진보이론 정론지에 많은 기대를 걸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동경과 기대를 밑거름으로 태어난 '진보평론' 은 역설적으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이 없으면 우리의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가 요구한 것은 바로 '현실의 가능성' 과 결부된 정치적 이상이기 때문이다.

'진보평론' 을 읽으면서 느끼는 공허함은 대체로 세 가지이다.

첫째, '진보평론' 을 중심으로 모인 좌파 지식인들은 신자유주의의 야만만을 강조하는데 급급하여 현존 사회주의 체제가 야기하였던 전체주의적 야만은 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동시에 왜 그렇게 갑자기 침묵했었는지를 자문해보아야 한다.

자본주의가 만약 마르크스의 이론과 개념으로 더 이상 설명될 수 없는 형태로 변하였다면, 구좌파는 여전히 사회변화에 저항하는 것은 아닐까. 둘째,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한 사람이 되는 자본주의적 기제가 여전히 맹위를 떨친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의 사회문제는 고도의 사회분화로 말미암아 결코 계급문제로만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을 바꿀 무기들을 실어 나르는' " '진보평론' 이라는 '역사의 기관차' 에는 여전히 민중.계급투쟁.착취의 모순.민중의 전세계적 연대와 같은 재래식 무기들만이 가득 차 있지 않은가.

끝으로 "모든 형태의 억압과 착취 및 배제에 반대하는 입장" 이라는 진보의 이념이 보다 선명하려면 자본주의가 어디에서, 어떻게 야만을 생산하는가 하는 정치한 현실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사회가 변하면 사회를 읽어내는 언어 역시 변해야 한다는 뜻이다.

'진보평론' 은 혹시 마르크스주의적 언어에 너무 충실함으로써 오히려 마르크스의 정치적 이상은 되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베를린 장벽이 마르크스주의를 전체주의로부터 해방시켰다면, 비판을 통한 인간성 추구라는 마르크스의 진보이념은 오히려 마르크스주의로부터 해방될 때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진우 교수 <계명대.철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