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로 공판대책위' 일본인들 교포인권향상 밑거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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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희로 (金禧老) 사건 당시 그의 구명에 앞장선 재일 한국인.일본인은 한둘이 아니다.

그들은 8년간에 걸친 金씨 재판과정에서 구명 운동 외에 일본인의 차별을 도마에 올렸다.

68년 4월에 결성된 '김희로 공판대책위원회' 멤버는 일본 내 金씨의 버팀목이었다.

발족 당시 간사역을 맡았던 사람은 8명으로 모두 일본인. 그중에서 가지무라 히데키 (梶村秀樹) 전 가나가와대 교수와 문학가 구보 사토루 (久保覺) 는 세상을 떠났다.

가지무라와 더불어 공판대책위를 사실상 이끌어왔던 오사와 신이치로 (大澤眞一郎) 는 지금 교토 (京都) 세이카 (精華) 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오사와는 95년부터 4년 동안 金씨의 후견인을 맡기도 했다.

나머지 6명은 각계의 원로로 활동 중이다.

공판대책위는 75년 해체될 때까지 金씨의 변호를 지원했고 모두 40차례에 걸쳐 대외 보고서를 냈다.

공판대책위는 당시 金씨를 '라이플 마 (魔)' 로 매도한 언론에 맞섰고 金씨 사건의 바탕에 일본 사회의 차별이 깔려 있음을 부각시켰다.

일본 사회가 金씨 사건후 그나마 재일 한국인의 인권 실태에 눈을 돌리게 된 데는 대책위의 활동이 밑거름이 됐다.

金씨의 특별변호인으로 대책위에 참가한 재일동포 사학자.작가인 김달수 (金達壽) 씨는 97년 타계했다.

공판대책위와 별도로 활동해 온 최창화 (崔昌華) 목사도 95년 고인이 됐다.

인질사건 당시 규슈 (九州)에서 현장으로 달려가 金씨와 일본 경찰 수뇌부를 만났던 그는 金씨의 자살 방지와 경찰의 사살을 막는데 온힘을 쏟았다.

도쿄 = 오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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