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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기업지배구조 현실에 맞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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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재계간담회 합의를 뒷받침하는 후속조치로 '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 초안이 어제 발표됐다.

민간인위원회가 자발적으로 안 (案) 을 만들었고, 정부는 그 실천을 위해 관련법과 제도를 보완하는 형식이지만 내용상 정부안이나 다름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는 경제의 글로벌화에 맞춰 기업들이 국제적으로 준수해야 할 최소한의 원칙을 만들어 이를 각국에 권고하고 있다.

의무사항은 아니지만 이를 적극 수용하지 않을 경우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돼있다.

우리의 경우 그동안 집중적인 입법조치로 기업지배구조개선을 위한 법과 제도는 꽤 정비됐지만 기업경영 행태의 변화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상장회사에 대해 사외 (社外) 이사가 의무화됐지만 대부분 요식행위나 '거수기' 역할에 그치고 있다.

주주총회와 이사회 및 감사제도가 형식적으로 운영돼 기업경영의 책임성이 미흡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경영현실에 맞게 이를 활성화하고 개선해 나가는데 이의 (異議)가 있을 수 없다.

무릇 기업지배구조개선은 기업경영의 투명성과 책임성 확보에 그 본질이 있다.

이 두 가지를 확보할 수 있는 공시제도와 채권은행의 감독 및 불량기업 퇴출 장치를 제대로 갖추면 된다.

문제는 이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재벌총수와 재벌체제의 감시와 견제 일변도로 흐르는 경향에 있다.

사외이사 의무비율 확대와 감사위원회 설치 의무화 소액주주 보호규정 등은 경영현실보다 이상에 치우친 감이 있고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강도 (强度)가 높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사외이사 숫자가 많으면 총수를 견제하기 쉬울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 안이하다.

우리 사회에서 그런 전문인력은 태부족이고, 식견이 부족한 인사들이 참여 아닌 간섭을 할 경우 의사결정의 지연과 오판이 우려된다.

사외이사가 3분의 2를 차지하는 이사회 내 감사위원회가 경영자 감시기구로 변질될 우려 또한 다분하다.

소액주주의 견제권한 강화도 소중하지만 소유지분을 넘어선 '주주행동주의' 는 기업가의 도전정신과 창의력을 저해할 수도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사외이사의 역할은 선진국에서도 아직 검증이 덜 된 상태며 미국의 경우 경영에 관여하는 일은 거의 없고 해당분야 전문가들과 사회 저명인사들의 '클럽' 역할이 고작이다.

OECD 또한 원칙에 따르되 규범의 구체적 내용은 각국의 제도와 문화, 경제적 현실에 따라 신축성을 허용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제도를 총동원해 기업을 감시하겠다는 의도가 앞선다면 그야말로 본말의 전도다.

경영의 전문성과 책임성을 살리는 데 사외이사제도가 그토록 절실하다면 공익성이 생명인 공기업들로 하여금 먼저 시범을 보이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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