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봉수9단 불꽃재기…테크론배.박카스배 결승 진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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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서봉수9단이 두개의 타이틀전 결승에 올라 막강 이창호9단과 유창혁9단을 상대로 10번기에 나섰다.

테크론배 프로기전에선 유9단과 5번기, 그리고 박카스배 천원전에선 이창호9단과 5번기. 승부세계의 뒷골목 저쪽으로 멀리 사라진듯 보이던 서9단이 어느날 홀연히 금빛 찬란한 무장을 하고 결승무대에 나타난 것이다.

서봉수9단의 별명은 '순국산' '잡초류' 등으로 유명하지만 '야전사령관' 도 있다.

오직 실전을 스승으로 삼아 동물적인 후각과 질긴 생명력으로 바둑판 361로를 누벼온 그에겐 아주 적절한 별명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조훈현9단이란 일세의 기재 (棋才) 때문에 근 15년간 2인자의 자리에 머물러야 했지만 바둑계 인사들은 그의 놀라운 승부근성과 실전능력에 경의를 표하며 사령관이란 칭호를 내준 것이다.

하지만 이 야전사령관은 93년 잉 (應) 씨배세계대회 우승을 고비로 서서히 뒷물결에 밀리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예선멤버로 주저앉고 말았다.

94년 38승25패 (60%) 95년 40승24패 (62%) 96년 31승27패 (53%) .60%대의 승률이 다시 50%대로 밀리며 내리막 길을 걷던 서9단은 그러나 97년에 25승10패 (71%) 를 기록하며 반짝 솟아오른다.

이 97년에 서9단은 국가대항전인 진로배세계대회에서 중국과 일본의 일류기사들을 상대로 불가능에 가까운 '9연승' 신화를 세우며 불꽃처럼 일어섰다.

죽은듯 하던 서9단은 이 사건으로 완전 회생하는듯 보였다.

사람들은 토종 서봉수의 생명력을 찬양하고 그의 복귀를 환영했다.

이에 부응하듯 얼마후 그는 국수전 결승에 올라 이창호9단과 도전기를 두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서9단은 98년에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유창혁9단에겐 3전3패. 성적이 하도 나쁜 탓에 이창호9단과는 아예 만나보지도 못했다.

옛 라이벌 조훈현9단에겐 그래도 1승1패. 하지만 전체성적은 15승16패로 30년 프로생활에서 처음으로 50% 미만의 치욕스런 성적표를 받아들게됐다.

그 서봉수9단이 올해는 현재까지 25승9패로 승률74%.그뿐아니라 유창혁 이창호를 상대로 타이틀까지 넘보게됐으니 놀랍다.

유9단과의 테크론배는 25일, 이9단과의 박카스배는 9월16일 한국기원에서 시작된다.

"요새는 통 바둑이 없어요. 라면도 못먹게 생겼어요" 하고 특유의 엄살을 늘어놓던 서봉수. 그러나 서9단은 위기가 닥치자 본능적으로 반응하여 모든 '놀이' 를 끊고 매일 한국기원에 나와 후배들의 바둑을 공부했으며 평생 멀리하던 산을 매주 혼자 오르며 마음을 단련했다.

40대 후반의 늦은 나이였지만 이같은 자세가 효과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바둑계 사람들은 촛불이 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번 빛나는 회광반조 (廻光反照) 의 현상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만년 승부사로 알려진 서9단이 느닷없이 컴퓨터사업을 시작한 것도 승부사로서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그의 결승무대 복귀는 잡초류의 대가다운 멋이 있다.

유9단에겐 통산전적이 19승25패로 승률43%.이9단에겐 16승43패로 승률이 불과 27%.전성기라도 힘든 상대들이다.

서9단은 "녹슨 검이지만 그냥 물러서지는 않겠다" 며 나즈막하지만 비장하게 임전소감을 토하고 있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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