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DJ의 국정 본격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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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은 국민회의를 '중산층.서민정당' 으로 바꿔 새롭게 출발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이를 위해 중산층을 경제 중심에 세우고 재벌체제를 뜯어고치겠다고 작심하고 나서고 있다.

이는 金대통령의 정치노선과 경제철학에서 볼 때 '제자리' 를 찾은 것이다.

취임후 이제까지 그는 의식적으로 경제주체들의 동시 만족과 각분야.계층에 대한 균형적 접근을 해왔다.

IMF 위기극복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박정희 (朴正熙) 전 대통령의 역사적 재평가로 상징되는 국민 대통합론이나, 재벌.중소기업간의 역할분담론에서 상당부분 벗어나 한쪽에 분명한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IMF 상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만큼 이제 DJ의 정치노선의 본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줄 기반이 마련됐다는 게 청와대측의 설명이다.

중산층.서민 우선과 재벌개혁은 '철학적 정치인' 임을 자부해온 DJ가 오랜동안 닦아온 정치.경제논리의 핵심 이슈다.

"중소기업을 재벌의 횡포에서부터 해방시켜줘야 한다" (92년 대선) , "신바람나는 민주주의를 위해선 다품종 소량시대의 경제가 돼야 하고, 그 중심에 중산층.서민이 있어야 한다" (97년 대선) , "경제의 진정한 발전은 경제.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모든 집단의 참여가 수반돼야 한다" ( '대중참여경제론' ) . 8.15 경축사는 이러한 DJ 국정철학이 본격적 실험단계에 들어갔음을 선언한 것이다.

국가 운영자로서 그가 역사의 어떤 이미지로 남느냐는 여기에 달려 있다.

재벌체제 종식은 방법론과 시장경제원리, 외국과의 경쟁 등을 놓고 치열한 논란을 낳고 있다.

서민.중산층을 위한 정부의 화려한 지원대책은 민심을 다독이기 위한 선심정책이라는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같은 시비에 대한 국민들의 1차적 평가는 내년 4월 총선에서 드러난다.

평가를 제대로 받기 위해선 정치쪽의 개혁이 확실히 드러나야 한다.

정치권과 권력집단의 개혁 없이 민간쪽만 친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재벌개혁에 수긍하는 중산층 중에도 2중적 의식구조가 있다.

자신이 중산층이라는 사람 가운데는 중산층.서민을 한 묶음으로 나누는 것을 꺼리는 사람도 있다.

계층을 분할하는 자체를 거부하는 심리도 있다.

이렇듯 복잡미묘한 중산층을 잡기 위해선 정치쪽의 개혁이 따라줘야 한다.

金대통령은 정치개혁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제대로 된 신당을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국민회의 이만섭 (李萬燮) 총재권한대행을 통해 '기득권 포기' 를 선언했다.

정치에 있어 기득권 포기의 핵심은 무엇인가.

재벌로부터 금융특혜의 기득권을 거둬들이는 것처럼 지역감정의 혜택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신당에 젊은 사람들, 전문가그룹이 대거 들어온다 해도 그 신당이 지역감정의 특혜 속에 성장하려 든다는 인상을 준다면 신선감을 가질 수 없다.

돈 안쓰는 선거, 부패에서 탈출하는 정당, 정당 민주화를 위한 개혁도 해야 하지만 지역감정의 특혜를 포기하는 결단이 가장 큰 개혁일 것이다.

기득권 포기의 또다른 측면은 신당이 DJ로부터 멀어져도 독자생존할 수 있는 자생력을 만드는 일이다.

DJ의 국정철학을 배운다 해도 그 우산 속에서 쉽게 당선하려해선 안된다.

단순한 인적 충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과거 'DJ신당' 의 반복이어선 안된다.

金대통령은 과거 동교동 시절 응접실 문 위에 장면 (張勉) 선생이 57년에 써준 휘호를 걸어놓았다.

지금 청와대 관저 소식당에 걸려있다.

내용은 이렇다.

'대붕일일 사남명 (大鵬一日徙南溟) 박요직상 구만리 (搏搖直上九萬里)' - 대붕이란 큰 새가 하루만에 남쪽 바다로 날아갈때,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하늘높이 오르기를 9만리. 장자 (莊子) 의 소요유 (逍遙遊) 편에 나오는 글이다.

휘호를 써준 장면 선생은 30대 초반 金대통령의 정치적 입문에 결정적 도움을 주었고, 종교적으로는 대부 (가톨릭 영세) 였다.

50년대 후반 험악한 여야갈등 속에 장면은 정치의 대범함과 권력운영의 여유를 다짐하면서, 이런 마음가짐을 정치 후학 (後學)에게 물려주려 한 것이다.

이를 국민회의 운영에 대입하면, 당의 장악력은 직접 현장에서 꾸려가기보다 한차원 높게, 그리고 한발 떨어져서 유지하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신당 창당을 뒷받침하는 金대통령의 고민 속에는 '소요유' 의 정신이 실려야 한다.

박보균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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