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 콤플렉스를 에너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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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일본에서도 유행하는 인기가요 순위를 매주 매긴다.

TV에서 처음 이걸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1위부터 10위까지 모두 영어노래가 아닌가.

아무리 서양문화가 판치기로서니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일본의 작곡가들은 무얼 하길래 이런가.

그러나 천만의 말씀. 노래제목만 영어로 붙였지, 모두 일본가수가 부르는 1백% 일본노래였다.

전체 가사중에 한두 소절만 제목으로 붙여진 영어가 잠깐잠깐 들어 있을 뿐이었다.

젊은층만 그런 게 아니다.

일본어로는 절대 안되는 것도 영어로 하면 직통인 경우도 적지 않다.

적어도 한달 이전에 예약해야 하는 VIP인터뷰도 영어로 신청했더니 그날로 가능했던 경우도 경험했었다.

이같은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영어라면 사족을 못쓰는 사대주의라고 해야 할까, 콤플렉스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외국문물 수입에 천재성을 발휘해 온 특유한 일본기질의 일단이라 해야 할까. 어느 일본 지식인은 동기나 원인이 어찌 됐든 '코쟁이 콤플렉스' 의 소치라고 고백했다.

정부든 언론이든 영어 잘 해야 폼을 잡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한물 간 거물들이 일본에선 여전히 비싼 값에 팔린다.

키신저의 글이 신문에 실리면 아무리 평범한 내용이라도 그날의 화젯거리가 된다.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해도 미국인이 하면 대문짝만하게 쓰는 게 일본언론의 사대주의다.

따라서 미국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은 왕따 당하기 십상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지난 89년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 으로 떠들썩했던 이시하라 신타로 (石原愼太郎) 같은 인물. 올해엔 도쿄 (東京) 도지사로 뽑혀 또 한차례 화제를 일으켰었지만, 다른지방 같았으면 어림도 없었다고 한다.

주류가 아니라는 뜻이다.

요즘 한국에서 유명해진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 (大前硏一) 도 같은 부류다.

미국 대학교수이기도 한 그는 미국을 거침없이 비판하는 데 앞장서 왔다.

그 역시 비주류로 분류된다.

미국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조용히 합의를 도출해 나가는 식이 이른바 주류요, 일본식이다.

한국의 콤플렉스는 어떤가.

최근 오마에 겐이치가 한국경제를 비판한 잡지 글이 장안의 화제인 걸 봐도 우리의 콤플렉스도 결코 일본 못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정작 일본에선 인기가 없어도 한국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거침없이 미국과 한국을 싸잡아 비판했다.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의 고문을 맡고 있는 그로선 당연히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새로운 내용이 있다면 한국언론들이 꺼리는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에 대한 직접비판 정도라고나 할까. 스티브 마빈이라는 이름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것이다.

증권사의 일개 투자분석가였던 그는 한때 한국경제를 쥐고 흔들었다.

언론마다 그를 대서특필했고, 환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한국경제의 주치의 (主治醫) 처럼 받들어 모셨다.

하지만 그는 그저 점쟁이 같은 존재였다.

주가가 300선을 깰 것이라고 용하게 맞힌 적도 있지만, 더많은 엉터리 점을 치고 엄청난 복채를 챙겼었다.

한국이 외국 컨설팅회사의 봉이 된 것도 콤플렉스의 또다른 단면이다.

IMF사태를 계기로 이들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갔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돈을 벌었다기보다 바구니에 긁어 담았다는 표현이 더 적확할는지 모른다.

앞을 다투어 무조건 그들에게 매달렸고, 제공되는 서비스의 값이 얼마짜리인 줄도 모른 채 달라는 대로 줬고, 그래서 받은 보고서들을 얼마나 많이 쓰레기통에 통째로 집어넣었을까. 바가지를 씌운 외국 컨설팅회사를 탓할 일이 아니다.

한국사람들끼리 서로 속여온 결과가 빚어낸 어처구니없이 비싼 대가였을 뿐이다.

있는 콤플렉스가 떼를 쓴다고 없어지진 않는다.

더더구나 광복절 기념사로 없어지길 기대할 수도 없다.

콤플렉스든 열등감이든 그 속엔 잘못이나 약점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이 숨어있는 법. 어찌 보면 못난 놈이 잘난 놈한테 느끼는 콤플렉스야 당연한 자연증상이 아니겠나. 오마에 겐이치든 스티브 마빈이든,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는 별로 중요치 않다.

문제는 한국 스스로가 어떻게 해나가느냐다.

그런 면에서 일본은 정말 희한한 나라다.

자신들의 뿌리깊은 '코쟁이 열등감' 까지도 위기감의 원료로 삼고, 또 그것을 새로운 에너지 창출의 원료로 쓰고 있으니 말이다.

'습관적 엄살론자' 들의 특유의 발전방식일는지도 모르겠다.

이장규 일본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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