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철인 독재자'를 기다린다…루슈코프 등 물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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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지금 러시아엔 철인 (哲人) 독재자가 필요하다' .총선 (12월) 과 대선 (내년 여름) 을 앞둔 러시아에 때아닌 '독재자 대망 (待望) 론' 이 번지고 있다.

정당들의 이합집산 (離合集散) , 언론의 폭로전, 기업들의 줄서기로 이전투구 양상이 벌어지자 "애국심과 카리스마를 갖춘 독재자만이 유일한 해결책" 이란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 (IMF) 차관과 파리.런던클럽 등 채권국가들과의 협상 등을 통해 겨우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암울한 경제현실도 독재자 대망론을 부채질하고 있다.

◇ 대권 판도 = 범 (汎) 개혁파 진영 내부에 주도권 쟁탈전이 치열하다.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은 유리 루슈코프 모스크바 시장. 지방자치단체 지도자들이 주축이 된 '브샤 러시아 (모든 러시아)' 당은 4일 루슈코프가 이끄는 '오체체스트바 (조국)' 당과의 통합을 공식 선언했다.

성공적인 시정 (市政) 활동을 통한 모스크바지역의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전국적 기반이 취약했으나 강력한 원군을 얻은 셈이다.

여기에 '나슈돔 러시아 (우리집 러시아)' 당을 이끌고 있는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전 총리가 대항마로 부각되고 있다.

지난 97년 대권에 대한 야심 때문에 총리직에서 해임됐으나 최근 코소보사태를 계기로 크렘린의 신임을 회복했다는 게 정가의 분석이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3일 "체르노미르딘은 강력한 선거팀을 갖고 있으며 우리는 그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고 지원사격에 나섰다.

그러나 사실상 가장 강력한 대안으로 꼽히는 인물은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전 총리. 여론의 높은 지지에다 우파와 좌파 모두로부터 거부감이 없는 프리마코프는 사방팔방에서 제휴요청을 받고 있지만 본인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 반격과 갈등 = 정국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크렘린의 공세도 만만치 않다.

옐친은 우선 루슈코프의 독주를 막기 위해 지난달부터 최측근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계 (系) 언론을 통해 루슈코프와 그 주변인사들을 집중공격하기 시작했다.

또 루슈코프 성향의 신문.방송에 대해 세무조사를 실시하고, 예금계좌도 차압해 '언론 길들이기' 에 나섰다.

크렘린이 친 (親) 루슈코프로 의혹받던 세르게이 즈베레프 크렘린궁 부실장을 해임한 것도 같은 이유다.

즈베레프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크렘린이 총선과 대선을 연기할 비상령을 준비 중" 이라고 주장, 상호비방전을 격화시키고 있다.

이런 갈등은 퇴임 이후 자신과 가족들을 보호해줄 수 있을 강력한 후계자를 직접 뽑겠다는 옐친 진영의 희망과 실제 현실과의 괴리 때문에 생겨나고 있다.

옐친이 체르노미르딘 전 총리에게 호감을 공공연히 표시하고 있지만 그는 최근 여론조사에서 1%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다.

옐친파 내부의 갈등도 심각해지고 있다.

옐친의 딸 타티야나 디야첸코와 다시 결탁한 금융재벌 베레조프스키측과, 서방에 의존적인 아나톨리 추바이스 전 제1부총리 진영이 충돌하고 있다.

◇ 이합집산과 독재자 대망론 = 다른 정당들도 세 (勢) 불리기에 안간힘이다.

보리스 넴초프 전 제1부총리가 이끄는 '프라보예 젤로 (바른 일)' 와 세르게이 키리옌코 전 총리의 '노바야 실라 (신세력)' , 그리고 콘스탄틴 티토프 사마라주지사의 '러시아의 목소리' 등 우파 3개 정당은 지난달 23일 합당을 발표했다.

단기필마였던 알렉산드르 레베드 크라스노야르스크 주지사도 지방지도자들과의 새로운 정치연합체 결성을 제의했다.

겐나디 주가노프 공산당 당수도 공산당 단독으로 총선에 나설 것이라는 당초 입장을 철회, 지난달 27일 모든 좌익세력의 통합을 촉구했다.

그러나 혼탁한 정쟁에 대한 반감으로 러시아인들 사이에는 '신독재자' 에 대한 기대가 절실해지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지의 러시아문제 전문가 로버트 카이저는 "러시아는 '큰 인물' 이 지배하는 정부에 익숙한 사회" 라 지적했다.

모스크바 = 김석환 특파원,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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