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의 사또 이야기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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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지난 4년간 청계천에서 물구경 실컷 하셨죠. 청계천은 물구경만 하는 곳이 아니예요. 서울의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장소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서울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 사또 복장을 하고 이곳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서울의 역사가 궁금하십니까. 그럼 제 얘기 한번 들어보실랍니까.”

지난달 25일 오후 청계천 광교와 삼일교 사이. 김정호가 제작한 서울 지도 ‘수선전도’가 그려져 있는 벽면 앞에서 울긋불긋 화려한 사또 복장을 차려입은 이정웅(68)씨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청계천 나들이를 나온 10여명의 시민과 관광객들이 이씨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여기 왕십리와 답십리란 지명 보이십니까. 한자로 열 십(十)이 아니고 원래는 깊을 심(深)이라고 나와 있죠. 본래 이곳의 지대가 낮았다는 뜻이에요.” 이씨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온갖 제스처를 써가며 열심히 설명을 해나갔다. .

“서울은 자연발생적으로 커진 도시가 아닙니다. 유교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조선 건국공신들이 만든 계획 도시입니다. 인의예지신의 유교사상 아시죠. 인의예지는 4대문에 구현됐죠.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이죠. 그렇다면 신(信)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곳에서 가까운 보신각이죠.”

이씨의 말에 곧바로“아”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자, 서울 곳곳에는 유교 이념이 살아 숨쉬고 있답니다. 세계에 자랑할만한 도시가 바로 서울입니다.” 이씨의 서울 이야기는 30분 넘게 이어졌다. 이씨가 이야기를 끝마치자 관광객들은 아낌 없는 박수를 보냈다. 일부 시민이“더 듣고 싶다”며 아쉬운 표정을 짓자 이씨는 “토요일 2시에도 나오니까 그때 오세요”라며 달래서 돌려보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는 “이야기에 몰입하다 저녁 산악회 모임 시간에 늦었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단체 외국인 관광객들이 카메라를 들고 이씨를 삥 둘러쌌다. 사또 복장 덕분에 이씨는 외국인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이씨는 매주 금ㆍ토ㆍ일 4시간씩 청계천 광통교와 수선전도 일대에서 관광객들에게 서울의 역사를 재미있게 설명해주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30분짜리 설명을 하루 여덟 번 하는 셈이다. 이씨 등 총 11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청계천과 광화문 광장을 안내하고 있다. 서울관리공단의 심사로 선발된 사람들이다. 부산 출신으로 경남고와 동아대를 나온 뒤 청계천 근처 무교동의 한 수출회사에 근무하다 은퇴한 이씨는 “서예를 배우다 서울의 역사에 흥미를 느끼게 돼 자원봉사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청계천에서 4시간 동안 쉬지 않고 서서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화장실에 가야할까봐 청계천에 나오기 한 시간 전부터 물 한 잔 안 마십니다. 평소 좋아하는 커피 마시는 것도 참아요. 화장실도 멀기도 하지만 사또 복장을 하고 화장실 가면 좀 보기가 그렇잖아요."

이씨는 평소 꾸준한 등산과 걷기로 체력을 다지고 있다. 그는 자원봉사가 없는 날에는 영등포와 노량진에 있는 복지관에 나가 붓글씨를 쓴다.

그는 인터넷에서 정보가 넘치는 시대일수록 이야기꾼이 더 절실하다고 말한다. “인터넷에는 토막 지식이 많아요. 저는 그런 토막 지식을 물 흐르듯이 엮어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청계천 벽면에도 명소를 소개하는 글이 있지요. 그런 정보에 숨을 불어넣어주는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그의 목에는 휴대용 소형 확성기와 함께 서울시 자원봉사센터에서 발급해준 신분증이 걸려 있다. “사람들이 돈을 받고 하는 거 아니냐며 오해할까봐 자원봉사자 신분증을 목에 걸고 다녀요.”

그는“외국 관광객들을 영어로 설명하지 못하는 게 가장 아쉽다 ”며“끝나고 ‘잘 들었습니다’란 말을 들을 때가 가장 힘이 난다”고 말했다.

김용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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