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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영감(靈感)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33호 02면

포도넝쿨을 움켜쥔 아이가 신이 나서 달음질을 칩니다. 작은 아이도 질세라 쫓아가며 넝쿨을 잡아챕니다. 넝쿨엔 먹음직스레 익은 포도 송이가 하나 가득 달려 있습니다. 달콤한 포도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아이들 얼굴엔 절로 미소가 피어오릅니다.
700년 전 고려시대에 누군가 그린 그림입니다. 아니, 새긴 걸까요. 그것도 도자기 주전자에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청자상감포도동자문표형주자’(위 사진·부분)가 됐습니다.

그 도자기 주전자를 유심히 본 화가가 있었습니다. 순전히 동자 무늬를 보러 여러 번 박물관을 찾아왔었다고 합니다. 구상 시인의 회상입니다. 고려시대 동자들의 표정에서 그는 순진함과 순수함의 원형을 발견한 걸까요. 그도 유독 아이들을 많이 그렸습니다. 1951~56년 사이 그린 ‘봄의 어린이’(아래 사진·부분)가 대표적입니다. 벌거벗은 아이들을 통해 넘치는 생명력을 표현한 화가의 이름은 이중섭(1916~56)입니다.

지금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으시면 화가 이중섭에게 영감을 준 작품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11월 8일까지 열리는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 전시장 초입에 보기 좋게 진열돼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냥 청자 주전자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사연이 읽혔습니다. 다시 보니 포도가 보였고, 아이들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마냥 쳐다보고 있었을 이중섭 화백의 얼굴까지도요.

그런데 왜 하필 포도 그림을 그려 넣은 걸까요? 혹 와인 애호가는 아니었을까요? 주전자에 포도를 그려 넣으면 물이 와인으로 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요?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그리고 궁금해집니다. 지금 박물관을 찾는 ‘21세기 이중섭’들은 어떤 영감을 받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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