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박상천 '5679는 나를 불안케한다'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나는 왜,

앞에 가는 자동차 번호판 숫자를

바꾸고 싶을까

5679는 5678이나 4567로 순서를 맞추고 싶고

3646은 3636으로, 7442는 7447로 짝을 맞추고 싶을까

5679, 3646, 7442는 나를 불안케 한다.

나는 왜,

카세트 테이프는 맨앞으로 돌려서 처음부터 들어야했고

삐긋이 열린 장롱문은 꼬옥 닫아야하고

주차할 때 핸들을 똑바로 해두어야 하고

손톱은 하얀 부분이 보이지 않도록 바싹 깎아야 할까

테이프와 장롱문과 핸들과 손톱이 나를 불안케 한다

……

그래도 나는

나를 불안케 하는 것들과 함께 살아간다. 잘 살아가고 있다

- 박상천 (朴相泉.44) '5679는 나를 불안케 한다' 중

이제 시는 농경사회의 정서적 족쇄를 벗어났다. 이 시는 도시는 물론, 농촌마저도 도시화돼버리는 오늘의 인간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의 익명성 자체가 불안을 낳고 있다. 불안이란 애매한 것이고 분명한 동기가 없고 유령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시에 사는 인간의 심상에서 가장 구체적인 현상이 불안이기도 하다. 이 시는 그런 일상생활 속의 묘미를 그려낸다.

고은 <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