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대우사태 정부·채권단 발빠른 교통정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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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2년 전의 악몽이 재연되는 것 아닌가'. 최근의 '대우 쇼크' 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97년 7월 기아사태의 악몽을 떠올리고 있다.

혹시나 97년 당시 기아로 인해 한국이 외환위기로까지 치달았던 상황이 이번에 재연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금융시장이 심하게 출렁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공통점이 적지 않다. 특히 주식시장 움직임이 그렇다.

기아가 부도유예 협약에 들어간 97년 7월 15일부터 1주일간 종합주가지수는 764.45포인트에서 725.98로 떨어졌다. 이번 역시 종합주가지수가 지난 23일 하루 71포인트나 폭락했고 26일에도 다시 30포인트 이상 떨어졌다.

금리.환율이 혼조를 보이는 것도 비슷한 모습이다. 대우의 국내외 차입금이 57조원으로 기아 (5조3천억원) 보다 훨씬 많은 것도 불안 요인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런 혼란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대내외 여건이 기아 때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덕훈 (李德勳) 한국개발연구원 (KDI) 연구위원은 "97년에 비해 경제의 기초여건이 많이 좋아진 데다 정부와 기업의 위기대응 능력이 향상돼 대규모 금융위기 발생 가능성은 작다" 고 평가했다.

금융 전문가들도 "각종 여건이 훨씬 안정적이라 투자자들의 불안심리만 해소되면 시장이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고 분석했다.

대우와 기아 상황을 비교 분석한다.

◇ 경제 여건이 나아졌다 = 97년은 한보.삼미.대농 등 한계기업의 연쇄 부도로 경제가 고꾸라지던 시기였다. 지금은 아직 안심할 정도는 아니지만 일단 외환위기를 조금씩 벗어나면서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

1년 미만 단기외채가 당시 9백76억달러에서 지금은 3백14억달러로 줄었다.

경상수지도 97년 84억달러 적자에서 허덕였으나 올해는 2백억달러 이상의 흑자가 예상된다.

해외 여건도 지금이 나은 편이다. 97년은 동남아.동유럽.중남미 등지에서 외환위기 도미노 현상이 벌어졌었다. 지금은 중국 위안 (元) 화 평가절하 가능성이나 미국 금리인상 움직임 등 악재가 있지만 각국이 외환위기에서 벗어나며 안정을 찾아가는 추세다.

엄낙용 (嚴洛鎔) 재정경제부 차관은 "97년은 문제가 터지기 시작하는 시기였으나 지금은 수습과정" 이라며 "정부의 문제의식과 대처방식도 당시와 크게 다른만큼 97년 같은 외환위기는 오지 않을 것" 이라고 말했다.

◇ 금융시장이 시장 수급에 맡겨져 있다 = 97년은 환율이 문제였다. 정부가 물가안정을 위해 원화환율이 달러당 9백원선에서 더 이상 오르는 것을 억제했던 것. 그러다 문제가 생기니까 한순간에 터져버렸다.

그러나 지금은 원화환율이 시장에 맡겨져 있다. 외환은행 관계자는 "환율의 하루 변동폭이 없어졌기 때문에 현 환율은 시장 수급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며 "최근 환율이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는 것도 이 때문" 이라고 지적했다.

권순우 (權淳祐)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대우의 구조조정을 신속히 마무리해 금융시장에 미치는 악영향을 최소화해야 한다" 고 지적했다.

◇ 정부가 적극 나서고 있다 = 97년은 권력 누수현상이 나타나는 김영삼 (金泳三) 정권의 마지막해로, 골치아픈 경제문제에 총대를 멜 사람이 별로 없었다.

여야는 기아를 대선에 이용하는 데 골몰했다. 정부 관계자는 "97년 1월 한보사태를 수습하려고 적극 개입했던 정부와 채권단 인사들이 줄줄이 고초를 겪자 기아 때는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는 바람에 실기 (失機) 한 측면이 있다" 고 회고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부가 적극 나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더욱이 지금은 정부의 말이 먹혀드는 정권 초기다. 97년 당시 경제팀은 시장이 작동하지 않는 데도 "시장에서 알아서 처리할 것" 이라고 방관적 입장이었던 반면 이번에 이헌재 (李憲宰) 금융감독위원장은 "우선 시장을 살려야 한다" 며 적극적이다.

◇ 김우중 (金宇中) 대우회장이 퇴진을 약속했다 = 기아 때는 김선홍 (金善弘) 전 회장이 막판까지 퇴진과 제3자 매각을 거부하며 버티는 바람에 채권단이 1천6백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가 무산됐었다.

그러나 김우중 회장은 "사태를 수습한 뒤 명예롭게 퇴진하겠다" 고 밝혔고, 자동차.㈜대우 정상화를 위해 나머지 계열사의 매각.분리를 감수하겠다는 입장이다.

채권단도 4조원의 자금 지원을 시작했다. 물론 金회장이 퇴진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일이 다시 꼬일 수 있다.

◇ 여론도 냉정해졌다 = 기아사태를 꼬이게 만든 일부 책임은 여론에도 있었다.

"기아는 국민기업이라 살려야 한다" 는 다분히 감정적 논리 때문에 정부나 채권단이 경제논리에 따라 처리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론도 대우의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조속한 마무리를 촉구하고 있다.

고현곤.홍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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