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72.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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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제10장 대박

희숙은 냉큼 다가와 한철규의 겨드랑이 속으로 손바닥을 밀어 넣어 팔짱을 끼었다.

액세서리 점포에서 견본품으로 얻어 바른 향수 냄새는 아직도 그녀의 머릿결에 진하게 남아 있었다.

문득 장마당 햇살에 검게 탄 승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주버님 팔짱 낀다 해도 서울에선 손가락질 받을 일 없겠지요?" "피곤한 모양이군요. 옛날에 한 두번 드나들었던 소문난 밥집이 이 근처 어디쯤으로 기억나는데, 아직도 영업하고 있을지 모르겠네…. "

"선생님 좋으실 대로 하세요. " "결혼하기 전 봉환이하고도 여행 다녀 봤습니까?" "딱 한 번 강원도로 뱀 팔러 갔던 게 다였는데, 멋대가리 없데요. " "혼자 사는 데 길들여지면, 남의 아픔을 헤아리는 데 미숙해져요. 자신도 모르게 이기적인 사람이 돼버리기 때문이지요. 독신생활 2년도 못되는 나도 벌써 그런 걸 느낍니다. "

"봉환씨도 그랬었는데, 결혼하고 나서는 달라지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았어요. " "제수씨가 마음 다잡아먹고 어지간히 잡도리했겠지요. 제수씨 남자 길들이는 솜씨에 놀랐어요. 집착이 대단합니다. 오늘 점포를 돌아보면서도 느꼈지만, 간단하게 포기하는 법이 없더군요. 교과서에 올릴 만하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

"봉환씨하고 결혼하기 전에 삼년 정도 사귀었던 남자가 있었어요. 근데요…. 워낙 지독한 놈을 만났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단련이 됐던가 봐요. 그렇고 보면 그 자식한테 휘둘리고 당한 걸 거꾸로 적용하면 그게 바로 내 남자를 꼼짝없이 다루는 법이 되던데요. 그 자식한테 하려던 앙갚음을 봉환씨가 몽땅 뒤집어쓴 꼴이 됐지만, 어떻게 하겠어요. 두번 다시 실패하기 싫었거든요. "

"그 자식이란 사람하고는 깊은 사이였던가요?" "미치겠네 정말. 잠자리도 같이 한 사이냐고 묻는 거죠? 안 그랬어요. 그런 일이 있었으면 뻔뻔스럽게 말이나 꺼낼 수 있겠어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었어요. " "알았으니,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설마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 "봉환씨한테도 그런 말 물어 보시면 안돼요. "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뭣 때문에 시시콜콜 고자질을 하겠습니까. " "남자들이란 걸핏하면 오해를 해서 무슨 말을 못한다니까요. " 넌지시 속내를 떠보려고 건넨 말이 빌미 되어 길바닥에 퍼질러앉아 울음보따리를 풀어놓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어 불안했다.

한철규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다독거렸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밥집은 그 자리에 있었다.비좁은 자리에 두 사람은 쪼그리고 앉았다.

술과 밥을 함께 주문했고, 밥보다 술이 먼저 나왔으므로 식사는 술에다 밥을 말아먹는 꼴이었다.

밥집은 한때 몸담았던 직장 후배가 퇴근길에 단골로 드나드는 식당이었다.

그에게 이끌려 두서너 번 이 밥집을 출입했었다.

출입했었던 터울이 들쭉날쭉이었기 때문에 주인과 안면이 익숙하진 않았다.

그러나 지난날 그들과 둘러앉아 마셨던 낡은 식탁은 조리대 바로 앞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식탁의 낡은 모양새와 놓여 있는 방향조차 옛날과 변한 것이 없었다.

그 식탁에 앉아 있던 자신의 모습을 확연하게 연상할 수 있었다.

후배들에게 끌려다녔던 술자리는 언제나 억병으로 취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 술자리에서 얼마동안 지체했었는지, 무슨 말을 주절거렸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었다.맞은편에 앉아 있던 동료를 손가락질로 가리키던 버릇만 어렴풋이 떠오를 뿐이었다.

모든 사물들이 안개 속에 갇힌 듯 가물거렸기에 눈에 보였던 것은 바로 자신의 손가락뿐이었고, 그것만이 기억에 남게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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