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글로벌포커스] '토빈세'와 '후쿠다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인터넷 앞에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는 유엔개발계획 (UNDP) 의 보고서를 계기로 전자우편에 세금을 부과하자는 논의가 일고 있다.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기술 (IT) 의 눈부신 발전은 그 긍정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선진국과 후진국의 경제격차를 더욱 벌려놓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UNDP 보고서는 지적한다.

인터넷이 지구촌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심화하는 주범 가운데 하나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보고서 작성을 주도한 후쿠다 사키코 박사가 제안한 '전자우편세' 는 IT발전의 수혜자들로부터 거둔 세금으로 인터넷에서 소외된 제3세계 인구를 돕자는 취지다.

가령 전자우편 1백통을 보낼 때마다 0.01달러 (12원) 의 세금을 매긴다고 가정하면 지난 96년의 경우 7백억달러를 모을 수 있었다는 것이 후쿠다 박사의 계산이다.

같은해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 지원에 투입한 공공개발원조 (ODA) 를 합한 것보다도 많은 돈이다.

같은 기준을 적용할 경우 올해에는 모금액이 1천4백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후쿠다 박사는 추산하고 있다.

납세자로서는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푼돈이지만 지구촌 전체로 그게 쌓이면 제3세계에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목돈이 된다는 설명이다.

세계인구 60억명 중 15억명이 하루 1달러 미만의 생활비로 연명하고 있는 비참한 현실을 고려하면 실현 가능성을 떠나 일견 설득력있는 제안으로 들린다.

'후쿠다세 (稅)' 는 지난 8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 예일대의 제임스 토빈 교수가 제안한 '토빈세 (稅)' 를 연상시킨다.

투기자본의 폐해를 막기 위해 모든 국제자본 이동에 1%의 세금을 부과하자는 그의 주장은 아시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해 지금은 '토빈세' 구현을 외치는 국제 시민단체까지 생겨났다.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월간지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베르나르 카생 주필이 창립한 '아탁' (ATTAC.시민지원을 위한 금융거래 과세추진협회) 이 그것이다.

지난달 말 파리 근교 생드니에서 이 단체가 주관한 행사에는 80여개국에서 1천2백명이 참가해 대성황을 이뤘다.

한국에서도 여러 사람이 왔다.

창립 1년만에 회원수가 10만명을 헤아리고 '아탁' 의 인터넷 웹사이트는 하루평균 조회수가 1만건을 기록할 정도로 호응이 대단하다.

경제적 세계화의 적폐 (積弊) 와 부작용에 천착하는 세계 비정부기구 (NGO) 들의 활동은 이미 일정한 성과를 낳고 있기도 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가 추진한 '다자간투자협정 (MAI)' 을 무산시킨 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경제 글로벌화의 첨병인 미국이 주도한 MAI를 지구촌 NGO들이 똘똘 뭉쳐 좌초시켰다.

새 천년을 맞아 제3세계 극빈국들의 외채 완전탕감을 주장하는 가톨릭계 시민운동인 '주빌리 2000' 의 노력도 부분적 결실을 거뒀다.

전세계 외채탕감 지지자들의 시위 속에 지난달 독일 쾰른에서 열린 회담에서 서방선진7개국 (G7) 정상들은 7백10억달러의 외채탕감 계획을 발표했다.

UNDP 보고서는 인터넷의 경제적 효과를 설명하며 한 예를 든다.

마다가스카르에서 코트디부아르로 40쪽짜리 문서를 우편으로 보낸다면 닷새가 걸리고 비용만도 75달러가 든다.

팩스로 보낼 경우 30분으로 단축되지만 비용은 45달러로 여전히 높다.

하지만 전자우편을 이용하면 0.2달러로 2분만에 끝낼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화 대안세력을 자임하는 NGO들의 시민운동에서 최근 발견되는 급속한 국제주의적 연대 경향은 인터넷의 발달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아탁' 의 급신장은 인터넷이 아니고서는 설명키 어렵다.

짧은 기간에 전세계에서 2천2백만명의 서명을 받아낸 '주빌리 2000' 의 놀라운 동원력도 인터넷에 배경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금융세계화에 대한 대항기구로 '대구라운드' 가 뜨고 파리와 쾰른의 국제시위에 사람이 가고 하는 것도 인터넷의 횡적 연결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경제적 세계화의 도구이자 상징인 IT를 통해 오히려 무분별한 세계화를 견제하는 그물망이 짜여가고 있는 셈이다.

세계화 자체에 대한 찬반 논의는 이제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그것을 각자 필요에 따라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현실정치 (Real politik)' 적 감각이 중요성을 더해 가고 있는 것이다.

배명복 파리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