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균형을 무너뜨린 ‘남이의 죽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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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장군 부부 묘와 남이 장군 초상 남이 장군 부부 묘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에 있다(왼쪽 사진). 남이의 부인은 한명회를 수양대군에게 천거한 권람의 딸이라는 점에서 권력의 비정함을 느끼게 한다. 서울 용산구 용문동 사당에 걸린 남이 장군 초상화다(오른쪽 사진). 매년 10월 1일 사당에서는 남이 장군 대제를 연다. 남이 장군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한 백성들이 그를 신으로 모셨다. 사진가 권태균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에게 공신은 필요악이었다. 재위 후반 세조는 신(新)공신, 구(舊)공신과 삼각 축을 형성했다. 세조는 공신들과 권력을 나눌 수밖에 없는 숙명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종은 이를 거부했다.
예종은 신구 공신을 상호 견제시켜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을 택하는 대신 공신들을 직접 제거하는 방법을 선택했는데, 그 첫 번째 사건이 남이의 옥사였다.

독살설의 임금들 예종② 新-舊 공신 권력투쟁

세조는 사망 넉 달 전인 재위 14년(1468) 5월 공신들과 술을 마시면서 “누가 원훈(元勳)인가? 한명회로다. 누가 구훈(舊勳)인가? 한명회로다. 누가 신훈(新勳)인가? 귀성군(龜城君)이로다”는 노래를 부르게 했다. 구훈은 한명회·신숙주·정인지 등의 구공신이고, 신훈은 세조 13년(1467)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신공신이었다. 진압 사령관이었던 귀성군 이준(李浚)과 대장이었던 강순(康純)·남이(南怡) 등이 신공신의 핵심이었다. 국왕과 구공신, 신공신은 권력의 삼각 축이었다. 세조는 이시애의 난 때 한명회와 신숙주가 모반에 가담했다는 증언이 나오자 둘을 가둔 적이 있었다.

세조는 구공신과 신공신을 적절하게 대립시켜 왕권 강화를 꾀했다. 그러나 예종은 현실을 무시하고 ‘모든 권력은 국왕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원칙에 집착했다. 예종은 즉위 직후 “정사(政事:인사권)는 나라의 큰 권한인데, 사사로운 곳으로 돌아가 공(公)을 폐하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공신들의 인사 관여를 금지시켰다. 그는 백관의 감찰을 맡는 사헌부 관리를 정청(政廳:인사관청)에 참여시켜 인사 청탁을 뿌리 뽑게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앞으로 위장(衛將)이 2부(部)를 거느리고 인사에 대한 모든 분란을 금지하라. 정청에 마음대로 드나드는 자가 있으면 비록 종친·재추(宰樞:재상)·공신일지라도 즉시 목에 칼을 씌워 구속하고 나중에 보고하라. 만약 숨기는 일이 있다면 마땅히 족주(族誅)하겠다.”

인사에 관여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구속할 것이며 이를 숨기면 족주(온 집안을 죽임)하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영의정 귀성군 이준과 우의정 김질이 함께 나서 “족주하는 법은 너무 과합니다”고 항의했고, 예종은 “족주를 극형(極刑)으로 바꾸어라”고 한발 물러섰다. 신공신 이준과 구공신 김질이 공신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공동 대응한 것이다. 그런데 예종은 구공신보다 신공신, 그중에서도 남이를 싫어했다. 세조는 죽기 한 달 전인 재위 14년(1468) 8월 남이를 병조판서에 임명했는데, 조선 중기 문신 이정형(李廷馨)은 『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 “세조가 벼슬을 뛰어넘어 남이를 병조판서에 임명했더니 당시 세자였던 예종이 그를 몹시 꺼렸다”고 전하고 있다.

예종은 “남이는 병조판서에 적당하지 못하다”는 한명회의 재종형인 중추부지사 한계희(韓繼禧)의 말을 듣고 즉위 당일 남이를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좌천시켰다. 예종 즉위 당일부터 남이에 대한 구공신의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본격적인 공세는 예종 즉위년 10월 24일에 발생했다. 병조참지(兵曹參知:정3품) 유자광(柳子光)이 밤늦게 승정원에 나타나 ‘급히 성상께 계달할 일이 있다’고 말했다. 입직승지였던 한계희의 동생 한계순(韓繼純)은 즉시 예종과 만남을 주선했다. 유자광은 예종을 만나 남이를 고변했지만 모호한 고변이었다. 이날 저녁 남이가 유자광의 집을 방문해 “혜성(彗星)이 아직까지도 없어지지 않는데 너도 보았느냐?”고 묻기에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세조 와병 때 생긴 혜성은 예종 즉위년에도 사라지지 않아 장안의 화제였으므로 유자광이 보지 못했다는 답변 자체가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유자광의 글씨 봄이 오니 강촌에는 일마다 새롭다며 자연을 노래했던 유자광은 남이를 모함했다는 혐의에다 서자에 대한 질시까지 겹쳐 대대로 간신의 대명사가 되었다.

“신(유자광)이 『강목(綱目)』을 가져와 혜성이 나타난 곳을 헤쳐 보이니, 그 주석에 ‘광망(光芒)이 희면 장군이 반역하고 두 해에 걸친 큰 병란(兵亂)이 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남이가 탄식하면서 ‘이 또한 반드시 응함이 있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혜성의 의미를 『강목』에서 찾아 ‘장군이 반역한다’고 해석한 인물은 남이가 아니라 유자광이었다. 유자광은 “조금 후에 남이가 ‘내가 거사하려고 한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남이가 기다렸다는 듯 ‘거사’를 말했다는 것인데, 유자광은 “신이 술을 대접하겠다고 하자 ‘이미 취했다’면서 마시지 않고 갔습니다”고 말했다. 기껏해야 술기운에 이 말 저 말 했다는 뜻이다. 유자광의 고변은 의문투성이였으나 예종은 이를 따져 보지 않았다. 한밤중에 자신을 불러낸 거대한 권력구조에 대해서도 주목하지 못했다. 예종은 남이가 군사라도 몰고 쳐들어 오는 듯 군사를 동원해 도성을 지키게 하고 한계순에게 남이를 체포하게 했다.

시간은 이미 삼경(三更:밤 11시~새벽 1시)에 접어들었지만 주요 종친들과 대신들을 수강궁 후원 별전(別殿)으로 급히 모이게 했다. 종친과 대신들이 도열한 가운데 끌려 나온 남이는 왜 끌려왔는지 영문을 몰랐다. “근래 누구를 만나 무슨 말을 했느냐?”는 예종의 질문에 남이는 “‘신정보(辛井保), 이지정(李之楨)과 만나 북방(北方)에 여진족이 준동하면 내가 진압하러 가게 될 것’이라는 등의 얘기를 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또 유자광의 집에 가 이야기하다가 곁의 책상에 『강목』이 있기에 혜성이 나타나는 구절 하나를 보았을 뿐 다른 것은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강목』에서 ‘장군이 반역한다’는 주석을 뽑은 유자광이 남이를 반역으로 꾄 혐의가 있었다. 별다른 혐의를 찾을 수 없자 예종은 유자광을 불렀는데 그제야 유자광이 고변자란 사실을 알게 된 남이는 머리로 땅을 치면서 “유자광이 본래 신을 불쾌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무고한 것입니다. 신은 충의지사(忠義之士)로 평생 남송(南宋)의 악비(岳飛)를 자처했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부르짖었다. 악비는 금나라에 맞서 끝까지 싸운 남송 장수로서 한족(漢族)에겐 충의의 대명사였다. 남이가 부인하자 예종은 남이의 측근 무장들을 신문했다.

순장(巡將) 민서(閔敍)는 “남이가 ‘천변(天變:혜성의 출현)이 이와 같으니 간신이 반드시 일어날 것인데, 나는 먼저 주륙(誅戮)을 받을까 염려스럽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이어 ‘간신이 누구냐’고 묻자 ‘상당군 한명회’라고 답했다. 남이는 세조 사후 구공신 세력이 자신을 공격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남이는 ‘왜 한명회를 언급했느냐’는 질문에 “한명회가 일찍이 신의 집에 와 적자(嫡子)를 세우는 일을 말하기에 그가 난(亂)을 꾀하는 것을 알았습니다”고 답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자백이었다. 한명회가 말한 적자는 예종이 아니라 고(故) 의경세자의 장남 월산대군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종은 한마디로 일축하고 남이의 측근 장수들을 계속 고문했다. 그들 대부분이 역모를 부인하는 가운데 기껏 남이의 첩 탁문아(卓文兒)가 심한 고문 끝에 ‘남이가 국상 중에 고기를 먹었다’고 자백한 것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여진족 출신의 무장 문효량(文孝良)이 혹독한 매를 이기지 못하고 “남이가 ‘산릉에 나아갈 때 중로에서 먼저 한명회 등을 없애고, 다음으로 영순군(永順君)·귀성군에게 미치며, 다음에는 승여(乘輿:임금)에 미쳐서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서려고 한다’고 말했다”고 자백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심한 고문 끝에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한 남이는 혐의를 시인하고 같은 신공신인 강순을 당류(黨類)로 끌어들였다. 인조 때 박동량(朴東亮)이 쓴 『기재잡기(寄齋雜記)』나 광해군 때 김시양(金時讓)이 쓴 『부계문기(<6DAA>溪聞記)』에는 강순이 ‘왜 나를 끌어들였느냐’고 따지자 ‘당신이 수상(首相)이 되어 나의 원통함을 알면서도 한마디도 구원해 주지 않았으니 원통히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답했다고 적고 있다. 당여(黨與)를 대라고 심한 매질을 당하던 79세의 노인 강순이 “만약 좌우의 신하를 다 당여라고 하여도 믿겠습니까?”라고 항의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무리수가 많은 옥사였다. 『부계문기』는 아직도 남이가 죽은 죄명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별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결국 예종은 남이·강순·문효량 등을 능지처사에 처하고 남이 계열의 무장들에게 수사를 확대했다. 남이가 여진족 건주위를 칠 때 종사관이었던 조숙(趙淑)은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한 충신이 죽는다”고 소리 지르다 죽어갔다. 예종은 “참형된 사람의 부자는 모두 사형으로 연좌하라”고 지시해 그 부친과 자식들도 모두 죽였다. 그리고 37명의 익대(翊戴)공신을 책봉했다. 1등공신 다섯 명은 유자광·신숙주·한명회·신운(환관)·한계순이었다. 아무런 관련 없어 보이는 한명회·신숙주가 1등 공신에 책봉된 것은 이 옥사의 배경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한명회는 남이·강순 등의 재산과 처첩들을 내려 달라고 주청했고 그 재산과 70여 명의 처첩을 익대공신이 나누어 가졌다. 옥사의 배후가 자신임을 드러낸 셈이었다. 남이의 옥사는 구공신의 신공신 토벌작전이었다. 예종은 신공신을 몰락시킴으로써 훗날 구공신이 자신에게 칼을 겨눌 때 견제할 세력을 스스로 제거한 셈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종이 왕권 강화책을 추진하자 구공신은 반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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