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당선인 “정운찬 총장님은 제게 좀 버겁습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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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호 34면

2002년 12월 경기고 총동창회는 매우 침울한 분위기였을 것이다. 그해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경기고 출신 첫 대통령 배출의 꿈을 ‘상고 출신 노무현’이 무산시켰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동문은 “12월 17일(대선일)은 국치일(國恥日)”이라고 개탄했다고 한다.

강민석 칼럼

이때 “국치일은 무슨 국치일이냐. 개천절이지”라고 맞받은 경기고 동문이 있었다. 정운찬 당시 서울대 총장이었다. 이 때문일까.

‘정운찬은 우리 편’이라고 생각한 노무현 당선인 핵심 측근들은 초대 총리 후보로 ‘정운찬’이란 이름을 흘렸다.

2003년 1월 23일, 노 당선인과 정운찬 총장은 단둘이서 식사를 했다. 다들 총리 제의를 포함해 모종의 프러포즈가 있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프러포즈는커녕 오히려 노 당선인은 예의 솔직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총장님은 제게 좀 버겁습니다.”
당시 정 총장에게 직접 취재한 대목이다.

연애를 할 때 남성이든 여성이든 “너는 나한테 과분해”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듣기에 나쁜 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말의 속내는 ‘결별’이다.

그럴 거라면 노 당선인 측은 왜 언론에 정운찬 카드를 띄운 것일까.
총리로 내정한 고건 카드가 너무 일찍 언론에 노출되는 바람에 공식 발표 때까지 보안을 유지할 필요가 있어 몇몇 카드를 추가로 흘린 것이란 고백을 나중에 노무현 정부 핵심 인사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결국 들러리가 필요했다는 얘기였다.

2007년 대선 국면에서도 ‘정운찬’은 구애의 대상이었다.
몇몇 민주당(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마치 당장 대통령 후보라도 만들어 줄 듯이 정운찬 후보자에게 ‘연서(戀書)’를 보냈다.

그러나 정 후보자도 그때쯤엔 달라져 있었다. 그의 답변은 “여권이 나를 불쏘시개로 이용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불쏘시개론’은 아마도 지난 정부와 정운찬 후보자와의 관계를 가장 잘 압축해 주는 말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정운찬 후보자가 마치 변심이라도 한 듯이 몰아붙이고 있다.
“연애는커녕 (민주당과는) 손도 한번 잡아본 적 없다”는 정 후보자인데, 이강래 원내대표는 “항상 마음속으로는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었기에 섭섭하고 허탈하다”고 한다. 박지원 정책위의장은 “정운찬 총리 후보자가 연애는 민주당과 하고 결혼은 한나라당과 했다”고 주장한다.

정 후보자가 MB와 손을 잡은 것이 ‘변신’이라면,‘애인’으로 생각했다면서 돌연 망신 주기에 나서는 것 또한 그 이상의 ‘표변’이다.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민주당이 정 후보자에게 덧씌운 표현들은 대략 이렇다.
전과자에 빗대 ‘8성 총장’이라고 비아냥거린 것은 약과다. 스폰서 총장, 매향노, 비리 종합세트….

그렇게 공을 들였다면서 “‘껍데기는 좋은데 내용이 좋지 않다’는 평이 많아 부총리로 기용하려다 포기를 했었다”(정찬용 전 청와대 인사수석)는 건 또 웬 말인가. 총리 후보자에 대한 자격 검증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팩트(사실)’로 과오를 따지고 드는 것과 인격을 모독하면서 낙인을 찍으려는 것은 다르다는 얘기다.

조조가 유비의 의형제 관우를 짝사랑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그런 관우가 조조에게 불가피하게 몸을 의탁하게 됐을 때의 조건 중 하나가 ‘유비가 있는 곳을 알면 언제든지 떠난다’는 것이었다. 관우가 마침내 유비의 행방을 알게 되어 떠나기로 마음을 정하고 조조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갔다. 관우의 낌새를 눈치챈 조조는 ‘근사방객고문’(謹辭訪客叩門)이란 글귀를 대문에 걸어 놓았다. ‘삼가 방문객이 문 두드리는 것을 사양합니다’라는 뜻의 ‘피객패(避客牌)’였다. 피객패가 물론 관우의 의지를 꺾진 못했다.

‘안량ㆍ문추(조조의 적군)를 베어 신세를 갚았네. 피객패 내건 조 승상을 떠날 일만 남았구나’.

하직 인사를 받지 않으면서까지 좀 더 붙잡아 두려 한 조조의 곁을 관우는 기어코 떠난다. 조조의 막료들은 관우를 추격해야 한다고 했으나 조조는 이를 물리치고 오히려 멋진 금포를 하사하며 그를 배웅하고 만다.

어차피 한국정치에서 피객패의 감동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 치자.
민주당엔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왜 중도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민주당에 오지 않고 상당수가 여권으로 향하는 건지. 이대로라면 중도주의자들이 민주당에 대해 문자 그대로의 피객패를 내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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