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은 살아있다] 먹자골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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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24일 낮 12시 명동의 사진관인 세븐칼라사장 뒷편 먹자골목. 와이셔츠를 팔뚝까지 걷어붙인 넥타이 차림의 직장인들이 골목길에 내놓은 간이 식탁앞에 줄줄이 앉아 입안 가득 국수를 먹고 있다.

매일 오전 6시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단골 손님들을 맞이하며 하루 장사를 시작하는 이 골목의 대표적인 먹거리집은 '서서먹는 할머니 국수집' . 올해 71세의 김기남 할머니가 이 자리에서만 39년째 국수를 팔았다.

막국수와 두부국수가 주메뉴. 한 그릇 가득 넘칠 듯 푸짐한 양에 국물과 사리를 원하는대로 더 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칠맛 나는 국수가 한 그릇에 2천5백원. 막국수.두부국수를 합쳐 하루에 5백 그릇이 넘게 나간다. 지금은 관절염을 앓고 있는 김할머니를 대신해 5년전부터 가게일을 도아온 딸 김경숙 (43) 씨가 주로 국수를 말고 있다.

이 골목엔 할머니 국수집 이외에도 순대국.청국장을 파는 '형제집' , 우렁된장찌게.순두부가 특기인 '미진분식' 이 골목안에 나란히 자리잡아 주머니 가벼운 직장인들의 입맛을 붙들고 있다.

금싸라기 땅으로 유명한 명동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할머니 국수집이 자리한 먹자골목 주변은 명동에서도 이색적인 먹거리 거리.

특히 국제통화기금 (IMF) 사태 이후엔 주변의 증권.은행 점포에서 일하는 샐러리맨들의 주머니 사정을 고스란히 반영한 저렴한 가게들이 대거 등장했다.

퍼블릭호프.피기호프.캠프호프.세이호프 등 저녁엔 맥주를 팔면서 점심엔 값싼 식사를 제공하는 소위 '호프집' 들이 많다. 이들 호프집들은 평균 3천원대의 저렴한 가격에 점심 식사를 파는데 각 업소마다 독특한 메뉴를 준비하는 게 특징.

퍼블릭 호프는 김치볶음밥 등 3천5백원 하는 점심을 아예 도시락에 담아 배달해주며, 피기 호프는 샐러드.사리 등을 원하는 만큼 무료로 제공한다.

캠프 호프는 청국장.콩나물 비빔밥, 세이 호프는 굴비백반 등 토속적인 메뉴가 점심 식단에 주로 올라 있는 것도 이색적이다.

"경제난으로 급감한 매출도 만회하고 점심에 성심껏 모신 고개들을 저녁 술자리로까지 연결할 수 있다" 는 게 '점심식당+저녁 술집' 을 표방하고 나선 업소 주인들의 전략.

이외에도 홍어외.오돌뼈 등의 이색 안주를 6천원 균일가격으로 파는 '제주도 솥뚜껑 삼겹살' , 원두커피를 각각 1천5백원과 2천원의 싼 가격에 파는 커피숍 '판디 커피' '태양의 길목' 등도 주변 샐러리맨들은 물론 '명동 매니아' 들에게 인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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