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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청산은 '정의 감각' 살리자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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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수지 김(김옥임)을 기억하는가? 가난한 집안의 딸인 그녀는 이리저리 떠돌다 홍콩에서 억울하게 살해당했으나 세상에는 여간첩으로 알려졌다. 그후 남은 가족들은 이웃에게 벌레처럼 취급당했으며 결국 어머니.오빠는 각각 화병으로 죽거나 사고로 이 세상을 하직했고 여동생은 이혼까지 당했다. 한 기자의 용기와 끈질긴 추적이 없었다면 그녀는 여전히 거물 여간첩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며, 5공 군부세력.공안기구.검찰 등 그녀를 간첩으로 만들었던 모든 국가기관의 행위는 여전히 칭찬받았을 것이다.

정은복을 아는가? 평범한 주부였던 그녀는 느닷없이 고모가 간첩이라는 이유로 연좌제에 묶여 국가기관에 끌려간 뒤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분열증에 걸려 실종되었고, 그녀를 찾아 다니던 남편도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여동생은 교통사고로 죽었다. 의문사위의 추적이 없었다면 이 사건 역시 단순한 정신분열증 환자의 실종사고 정도로 취급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 땅에는 수천.수만, 아니 수십만의 수지 김, 정은복 가족이 아직도 억울함을 삭이지 못하고 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억울한 죽음들을 해원(解寃)하자고 하니 박근혜 대표는 오히려 "좌익.친북 인사까지 조사하자"고 맞받았다. 앞으로도 계속 수지 김 같은 불행한 희생자를 만들어 내자는 이야기인가. 박 대표는 자신이 청와대에서 퍼스트 레이디로서 세상물정 모르고 살던 시절, 서울 어디에서 택시기사가 대통령 욕했다가 손님 신고로 경찰서에 잡혀가 호되게 두들겨 맞고, 막걸리 마시고 홧김에 세상 욕했다가 중앙정보부 끌려가 고문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나 있는가. 나는 전 세계에서 한국보다 '좌익'과 그 가족에 대한 처벌이 철저했던, 아니 철저하다 못해 궤도를 넘었던 나라를 알지 못한다. 만약 박 대표가 아버지의 친일.좌익 전력 시비 때문에 마음이 편지 않다면 이렇게 맞불 놓을 것이 아니라, 태어나 얼굴도 본 적 없는 아버지.삼촌의 과거 전력 때문에 버젓한 직장 취직도 못할뿐더러 시도 때도 없이 경찰서에 잡혀 가는 '연좌제'의 멍에를 안고 살아온 수십만의 불행한 영혼이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최소한의 안타까움이라도 가져야 할 것이다.

독재정권에는 벌레처럼 보였을지 모르는 한 평범한 인간도 가족과 이웃에게는 온 세계와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개인 간의 살인과 폭력사건은 엄한 사법의 심판이 되지만, 정치적 살인의 가해세력은 모두 용서되고, 또 그 진상 공개가 되지 않는다면 누가 정치를 신뢰할 것이며 사회 정의를 소중하게 생각할 것인가. 박 대표가 국민의 신뢰를 받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청와대에 있던 시절 실제 공안당국.경찰서.공장.학교 등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공부할 필요가 있다. '응답하지 않는 권력'에 좌절하고 분노했던 수많은 영혼이 이 땅에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물론 "박정희가 프락치였다"는 여당의 반격 역시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과거 청산은 박정희 전력을 밝히는 것이 돼서도 안 되고, 특정 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는 것이 돼서도 안 된다. 사실 박정희의 모든 전력에 대해 이미 오래 전부터 웬만한 국민은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박정희의 전력이 새로 밝혀진다고 세상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도 않다. 물론 친일 인사의 명단과 활동이 보다 확실하게 공개된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가 뒤집어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이미 우리 평균적인 국민의식은 상당히 성숙되어 있기 때문에 과거 청산 분위기에 화들짝 놀라 지나치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쪽의 행동이 오히려 이상해 보인다.

그런데도 왜 과거 청산인가? 그것은 더 이상 수지 김 같은 공권력의 피해자를 만들지 말자는 것이고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공리가 온 사회에 퍼져 권력자와 국민 모두 '정의의 감각'을 갖게 만들자는 것이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사회과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