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의 컬처코드 (27) 배우의 뼈 깎는 고통만이 감동이라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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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개봉한 영화 ‘내 사랑 내 곁에’가 김명민(사진)의 감량투혼으로 화제다. 루게릭 환자로 분해 무려 20㎏을 감량했다. 그것도 촬영 전 점차적으로 감량한 것이 아니라, 촬영 시작과 함께 살빼기에 돌입해 실제 환자처럼 매일 0.5~1㎏을 줄여야 했다. 극단적인 단식과 하루 2시간 이상 수면금지가 불가피했다. 우울증·저혈당 증세가 따라왔다.

시사회 전 만난 그는 “건강을 망칠 수 있다는 의사의 경고에도 내가 선택했고, 배우로서 선택에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10㎏ 정도 회복됐지만 여전히 불편해 보였다. “교통사고가 나면 회복돼도 예전 몸이 아닌 것처럼, 나도 예전 몸이 되긴 힘든 것 같다”고 말할 땐 마음이 짠했다.

김명민의 안쓰럽게 마른 몸은 영화 후반부 짧게 비춰진다. 죽음 문턱에 있는 장면이다. 병상에 누운 뒷모습이지만 피골이 상접한 전라의 몸이 화면 가득 잡힌다.

#그의 감량은 ‘머시니스트’에서 불면증 환자를 연기하기 위해 30㎏를 감량한 크리스천 베일에 비견되고 있다. 베일은 현재 촬영 중인 영화 ‘더 파이터’에서도 마약중독 권투선수로 분해 극한의 재감량에 도전하고 있다. 극단적 감량을 통해 배우의 육체적 정신적 한계에 도전하는 대표 케이스로 지목되는 그다.

우리 배우 중에서는 ‘역도산’의 설경구가 유명하다. 배역에 따라 몸을 자유자재로 불렸다 늘였다 하는 ‘고무줄 몸무게’의 주인공이다. ‘역도산’ 때 30㎏ 가깝게 몸을 불려 화제를 모으더니, 아이를 유괴당한 앵커로 나온 ‘그 놈 목소리’에서는 해쓱해 보일 정도로 살을 뺐다. ‘꼴통’ 강력반 형사로 나온 ‘강철중’에서는 단기간 13㎏을 찌웠다.

이런 ‘몸연기’가 중요한 것은 ‘몸이 바뀌어야 정신이 바뀌기 때문’이다. ‘미녀는 괴로워’에서 특수분장을 통해 100㎏에 육박하는 ‘뚱녀’로 변신했던 김아중은 “몸이 뚱뚱해지니 동작과 행동이 바뀌었고 절로 뚱녀의 성격, 마음가짐, 감정이 생기더라”고 했다. 육체가 정신을 지배한다는 얘기다.

#배우가 자기 자신을 비우고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하는 ‘메소드’ 연기의 전통도 한몫 한다. 김명민은 “컴퓨터그래픽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멀쩡한 몸으로 아픈 척 하는 것과 진짜 아픈 것은 다르다. 진짜 아파야, 그 고통이 관객에게 진심으로 전달된다”고 말했다. ‘하는 척’이 아니라 ‘실연’에 연기의 진정성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실연’ 혹은 ‘죽음을 각오한 배우의 투혼’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영화의 완성도로 연결되느냐이다. 가령 ‘역도산’은 영화 마케팅 포인트가 됐던, 설경구의 ‘몸 만들기 드라마’ 자체가 영화에서 가장 흥미롭고 감동적인 부분이 됐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어떤가. 직설화법과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소재 선정에 능한 박진표 감독은, 다큐드라마처럼 루게릭 환자의 투병과정을 담담하게 담았다. 관객에게 과장된 감정을 강요한다는 저간의 비판을 의식한 탓인지, 화면은 아주 건조하거나 밋밋하다. 문제는 극중 종우는 죽어가고, 김명민의 몸은 버쩍 말라가며, 아내(하지원)는 비탄에 잠기는데도 정작 관객의 마음에서는 별다른 감정의 파고가 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은 한 글에서 이 영화에 대해 “김명민의 몰입과 노력을, 아니 희생을 거의 무(無)로 돌려 버린다. 영화는 ‘니 들이 사랑을 알아’라는 대사를 쓰며 사랑에 대한 직설을 구사하지만 정작 사랑의 감정에 대해서는 말하는 게 없다. 이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에서 김명민의 말라가는 나신을 목도하는 것 외에 무엇을 더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썼다. 그의 말에 200% 동의한다.

만약 김명민의 투혼만이 이 영화의 유일한 감동이라면, 심지어 그마저 영화 속에서 효과적으로 구현되지 않았다면, 이건 배우의 열정에 대한 ‘착취’ 아닌가.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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