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 '햇볕'이 유죄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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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민심은 조석변 (朝夕變) 인가.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지난 1년 업적 중 가장 성공한 정책으로 여론조사에 나타난 게 경제위기 극복과 햇볕정책이었다.

그 햇볕정책이 지금 시비대상에 오르고 있다.

서해안 교전사태를 계기로 '햇볕 폐기.무용론' 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야당은 햇볕정책의 폐기와 비료지원.금강산 관광.대북송금 등 대북지원 일체의 즉각 중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비료 주고 식량 바치니 뺨 맞는 것밖에 더 있느냐, 대북 저자세를 취하니 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이 틈을 타 적이 북방한계선을 넘은 게 아니냐는 '햇볕 유죄론' 이 언론을 통해 확산되고 있다.

이런 주장이 공중잡이로 한바퀴 돌아 곤경에 처한 정부가 시국타개를 위해 북과 어떤 교감을 했으리라는 '신북풍설' 로 둔갑되기도 한다.

햇볕론에 치우치다 보니 안보문제에 소홀한 점이 있었다는 지적은 정부도 반성할 대목이다.

북방한계선에 대한 명확한 입장표명이 늦었고 교전규칙에 따른 즉각 대응이 한발 늦었다는 비판도 경청할 만하다.

그렇다고 해서 햇볕정책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이유가 없다.

어느날에는 금강산 관광 하나로 통일이 된 듯 열광하다간 서해교전이 일어나자마자 햇볕 유죄론으로 들끓는 이 변덕스런 냄비체질이 더 큰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냄비체질에 편승해 안보론자는 기세를 얻고 햇볕론자는 궁지로 몰리는 여론몰이가 더욱 개탄스럽다.

정치적 입장과 지역간 격차, 세대간 차이를 뛰어넘어 신중하고도 이성적인 판단과 국민적 합의로 추진해야 하는 게 대북정책이다.

그런 합의와 타당성을 일단 인정받은 게 지난 1년간의 햇볕정책이었다.

그러나 서해안 총성이 울리자마자 무용론.폐기론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마치 이때를 기다리기나 한 듯 일부 언론, 일부 지식인들이 앞장서 햇볕론을 씹고 할퀴고 있다.

여기에 옷로비 파업유도설로 등 돌린 민심을 부채질하면서 야당이 햇볕론 총공세를 벌이고 있다.

마치 햇볕이 모든 재앙을 불러들인 듯 '햇볕 죽이자' 로 나오고 있다.

햇볕이 유죄인가.

그렇지 않다.

남북간에 대결과 대화의 두 측면이 공존하듯 안보와 화해는 동전의 앞뒷면이다.

햇볕정책이란 강한 안보와 화해협력의 양날개를 달고 있다.

무력도발에는 단호한 응징이고 경제교류와 협력을 통해 남북 상생 (相生) 의 공존체제를 유지하자는 게 햇볕론의 기본이다.

당파와 정권, 지역과 세대간 차이를 넘어서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빛을 볼 수 있는 남북문제 해결의 멀고도 험난한 길이다.

DJ가 싫으면 햇볕도 싫고 DJ가 나쁘면 모든 게 나쁘다는 식이어선 대북정책이 바로 설 수 없다.

햇볕이 군 사기를 죽이고 무력도발을 유인한다는 주장이야말로 마녀사냥식 감정대응이다.

군인은 전쟁도발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억지를 위해 존재한다.

지혜로운 판단과 단호한 응징이 현대전의 요체다.

교전규칙에 따라 무조건 사격하는 게 아니라 적의 전쟁도발인지 아닌지 판단할 줄 아는 군 수뇌부의 판단이 더 중요하다.

이 판단을 위해 이틀간 대치상태에 있었다 해서 햇볕 때문에 군 사기가 떨어지고 대처능력이 해이해졌다고 몰아붙여서는 안보가 제대로 되질 않는다.

주기만 하고 받는 게 없는 햇볕론은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너무 단견 (短見) 이다.

굶주린 북한동포를 돕는다고 비료와 식량을 보냈다.

지난 1년간 도합 7백억원어치다.

결코 적은 돈은 아니지만 무너지는 은행 하나 살리기 위해 무려 몇조원을 퍼붓는 판에 북한동포 돕기에 7백억원 보내놓고 돌아오는 게 없다고 금방 불평하면 너무 조급하다.

아침에는 동해안 금강산을 예찬하다가 저녁엔 서해안 교전으로 모든 게 끝난 듯 호들갑을 떠는 냄비체질로는 안보도 햇볕도 제대로 될 리 없다.

포탄이 쏟아지는 판에 무슨 금강산이고 차관급회의냐고 비난한다.

대결국면일수록 대화와 교류의 창구를 열어 긴장을 풀어야 한다.

그저께 김순권 (金順權) 옥수수박사가 1주일 북한체류를 마치고 돌아왔다.

서해교전 기간 중이었지만 북한 현지에선 아무런 위험이나 공포를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금강산 관광객들도 같은 분위기를 전한다.

1년 남짓 진행된 햇볕정책 때문에 그나마 서해 교전에도 일반시민들은 냉정했고 확전 (擴戰) 이나 전면전이 없으리라 믿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안보를 내세워 햇볕무용과 폐기를 주장할 수 있는가.

안보와 햇볕은 함께 가는 것이다.

냄비 끓듯 하는 여론몰이로 일전불사의 전쟁무드를 조성하지 마라. 이성을 되찾자.

권영빈 논설위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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