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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삶을 풍요롭게 해야 잘 지은 건물"

중앙일보

입력

건축, 사유의 기호-승효상이 만난 20세기 불멸의 건축들
승효상 지음, 돌베개, 295쪽, 1만8000원

‘사유의 기호’라는 모호한 제목보다 ‘불멸의 건축’이라는 부제가 아마 더 쉽게 와닿을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건축사에 길이 남을 20세기의 걸작 건축물을 소개하는 건축기행문이다. 그러나 바르셀로나의 명물인 안토니오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나 프랭크 게리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같이 떠들썩하고 요란한 건축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처음엔 실망할 수도 있다. 눈을 현혹하는 화려한 건축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겉보기에는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재미없는 건축들만 잔뜩 모아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 머리에 소개된 아돌프 로스의 로스하우스처럼 이 책에 소개된 건축들은 모두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건축으로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단지 외관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집의 모양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건축을 일개 조형물로 보는 잘못된 시각이라며 건축은 삶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책에 소개된 건축물은 모두 이런 주장에 충실한 좋은 본보기들이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의 미하엘 광장에 자리잡고 있는 로스하우스는 왕궁과 마주 서 있다. 일체의 장식 없이 기능적 요소로만 구성된 이 6층짜리 집은 1911년 완공 당시 화려하기 그지없는 왕궁에 대한 모독이란 비난까지 받았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시민계급이 신분적 열등감을 덮기 위해 과시적으로 화려한 장식으로 일삼던 문화적 퇴행을 잘라내고 모더니즘으로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든 혁명적인 건축이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바이센호프 주거단지는 또 어떤가. 3000평 남짓한 부지에 33개동의 주택으로 이뤄진 이곳은 르 코르뷔지에 등 시대를 풍미한 건축가 16명이 참여한 작품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소박하다. 그러나 미래 여성의 역할에 관심을 갖고 가사노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 짧은 동선으로 효율을 극대화하고, 주택 내부로 빛을 끌어들여 환기와 위생문제를 해결하는 등 시대를 앞서는 눈이 그대로 담겨 있다. 저자가 생각하는 좋은 건축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건물을 세우는 목적에 충실하고 시대를 반영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건축은 예술과 기술의 결합’이라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건축은 단지 외관의 예쁘고 밉고의 차원이 아니라 창작 의지의 관점에서 본다면 예술일 수 있으며, 또 건물을 세우는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우리 문명을 지탱하는 진보의 차원에서 본다면 건축은 또한 엄청난 기술이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 비춰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든 큰 사건으로 콘크리트의 발명과 고딕 양식을 꼽는다. 2000년 전 로마인이 발명한 콘크리트는 크기나 모양을 자유자재로 변형할 수 있어 재료의 의지보다 작가의 의지가 중요하게 된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중세 고딕 양식을 꼽은 이유는 이 양식이 건축을 중력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과거 건축물에서 벽체는 지붕의 하중을 견뎌야 하기에 두꺼웠고 창문을 내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고딕에서 완성된 볼트형 지붕은 몇개의 기둥만으로 받쳐지므로 지붕의 중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결국 벽은 내·외부를 가르기만 하면 돼 자연스레 큰 창문이 생겨나고 빛이 자유로이 내부로 흐를 수 있게 됐다. 이후로도 내부에 있어야 할 설비와 배관을 밖으로 노출시킨 파리 퐁피두센터처럼 건축 기술의 진보는 끊임없이 진행돼 왔다.

책을 덮을 때쯤이면 ‘건축이 무엇인가’라는 건축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가는 저자의 사유 과정은 고스란히 독자의 것으로 남는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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