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메이커의 편지] 아직도 성스러운 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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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유미리의 신작소설 '골드 러시' 를 읽으면서 편집자의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소년 살인' 이라는 사회적 사건에 열네 살 가출 소녀라는 사적인 체험, 인간의 근원적 악마성이라는 형이상학적 테마를 섞어 멋들어지게 표현한 작가적 능력에 한없는 매혹을 느낀 것은 물론이다.

일본에서 '소년 살인' 이 가져온 사회적 충격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열네 살 소년이 아무 죄책감 없이 어린 소녀를 살해하고, 그 행위를 기록으로 남기기까지 한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의 심층에 만연된 폭력성과 그것을 적절하게 제어하지 못해내는 학교 교육의 실패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일본의 편집자들이 이 사건을 다루는 방식은 놀랍게 다양했다.

소년의 부모가 쓴 수기, 학교 붕괴를 다룬 논픽션, 유명 작가와 청소년들의 심층 인터뷰집, 교육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전문 연구서 등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왔다.

출판의 미디어적 속성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7년째 편집자 생활을 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이 한국의 출판이 아직도 '성스러운 책' 또는 '지식의 신성 보관소' 같은 경전 (經典) 의 사유 방식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90년대를 기획 출판의 시대 또는 편집자의 시대라고 하지만, 그 기획과 편집은 '경전 지향' 에 억눌려 너무나 쉽게 '출판 상업주의' 로 매도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출판 기획의 중심은 상업적 성공보다는 급변하는 시대에 맞춰 질문 방식을 바꿔줌으로써 지식 산업의 대응력을 높여 독자들이 쉽게 책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한 선배가 구본형의 '익숙한 것과의 결별' 이라는 책을 냈을 때, 후배 편집자들과 제목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다.

그 제목은 '자기 경영' 이라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절묘하게 짚어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떤 식자는 칼럼에서 '지적위기' 를 말하면서, 독자들이 고급 인문학 서적들을 읽어주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러한 호소만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시대의 문제가 있는 곳에 사유를 배치하려는 부단한 노력이 없는 한, 그러한 현상은 결코 시정되지 않을 것이다.

출판 편집자로서 언제나 시대의 문제와 함께 호흡하는 책을 만들고 싶다.

장은수 황금가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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