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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럼] '정부의 실패'가 더 겁난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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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고급옷 로비 의혹사건이 '찻잔속의 태풍' 으로 일단 가라앉았다.

'실패한 로비' 이고, 더구나 석달 전에 내사가 끝난 사건이 다시 불거져나온 배경을 놓고 음모론도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가십성 사안' 을 놓고 온나라가 떠들썩한 것을 보니 한국이란 사회는 역시 바닥이 좁고,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나라 같지가 않다는 바깥의 한가한 시각 또한 없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가 중시하는 사건의 본질은 정경유착과 부패의 고리가 개혁을 부르짖는 '국민의 정부' 핵심공직자의 안방에까지 공공연히 뻗치고 있는 현실에 있다.

작은 일에도 흥분할 때는 흥분해야 하고, 개혁 주도세력에 대한 일반의 배신감은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유명 의상실이 '악의 소굴' 처럼 비춰지고, 그곳에 드나드는 부유층들이 '죽일 ×' 로 매도당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그 못지 않게 심각한 문제다.

거래장부와 고객리스트가 추적당하고 세무조사의 공포속에 패션업계는 전전긍긍한다고 한다.

속이 후련해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그럴 바에야 자본주의는 왜 하느냐는 앙칼진 의문도 쏟아진다.

게다가 경기회복으로 고가 (高價) 의 소비재 수입이 크게 늘어나면서 TV의 카메라는 통관중인 고가의류와 골프채에 초점을 맞춰 이를 '악덕' 으로 질타하는 분위기다.

글로벌 소비자시대에 한가지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우리의 반 (反) 시장주의적 행태를 국제사회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기업가와 자본가는 성인 (聖人) 이 아니다.

시장원리에 따른 합리적 이윤추구를 넘어선 '도덕군자' 를 요구함은 처음부터 무리다.

사회의식의 성숙 없이는 시장경제도, 자본주의도 뻗어나갈 수가 없다.

더욱 딱한 것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내세우는 현 정부가 도리어 반 (反) 시장적 행태에 앞장을 서고, 더러는 이를 부추기는 경향이다.

빅딜은 엎질러진 물이라 치고, 재벌총수들에 대한 사재 (私財) 출연 압박이 그 상징적 예다.

이는 자본주의의 근본을 흔드는 일이다.

물론 당국자들은 강요한 바 없다고 정면 부인하지만 '사회적 압력' 을 들먹이며 그 책임을 여론에 미룬다.

지난 1년반 동안의 개혁과정에서 정부의 시장개입과 관치 (官治) 의 부활은 끊임없는 논란을 불러왔다.

그러나 당면한 국난을 극복하고 경제의 틀을 다시 짜는 과정에서 일정기간 정부개입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고, 경제주체들 역시 대승적 견지에서 이를 용인해왔다.

그러나 '시장의 실패' 를 바로잡기 위한 정부의 개입은 한시적 (限時的) 이어야 하고, 사람보다는 제도에 의한 개입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정부의 실패 (government failure)' 를 결과한다.

정부가 문제해결자가 아니라 '정부가 바로 문제아' 가 된다.

'정부의 실패' 조짐은 역력하다.

기업들의 자발적인 구조조정을 유도하려면 동기부여적인 시장시스템을 개발해야 한다.

그럼에도 현 정부의 구조개혁은 가이드라인을 정해놓고 이에 따르지 않으면 제재를 가하는 징벌방식에 머물러 있다.

DJ정부의 개혁은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원맨쇼나 다름없다.

대통령 혼자서 몸부림칠 뿐 관료집단이나 공기업들에서 개혁의지를 읽어내기 힘들다.

개혁의 주체가 모호하고, 경제주체들이 몇년 후를 내다보고 예측을 할 수 있는 기본 밑그림이나 전략적 청사진도 없다.

더구나 DJ개혁은 총론에서 이제 각론으로 옮아가야 할 단계다.

그럼에도 총론을 둘러싸고 혼란과 혼선이 가시지 않는다.

미국의 대공황 직후 루스벨트의 뉴딜 개혁은 취임 1백일만에 기본틀이 잡혔다.

시장의 메커니즘을 새로 짜는 과정에서 정부개입과 규제는 불가피했고, '독재자' 라는 비난은 물론 체제에 대한 의심까지 받았다.

그러나 상황논리와 반대자들의 포용으로 고비를 넘겼다.

대표적인 논객 월터 리프먼은 개인적으로 루스벨트를 싫어했지만 그의 개혁만은 적극 뒷받침했다.

DJ개혁에는 이런 뒷받침이 없다.

지지자와 반대자가 처음부터 편이 갈라져 반대자는 무슨 정책이든 발목부터 잡고보는 경향이다.DJ정부의 태생적 문제점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DJ의 자업자득이다.

반대세력의 포용과 동참에서, 개혁의 홍보에서 실패한 것이다.

각론적 구조조정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인 (人) 의 장막을 걷고, 내년선거나 후일에의 집착을 버리고, 각분야 전문가들로 진용을 짜 시장원리에 따라 개혁의 제도화에 나서야 한다.

경제의 회복국면은 개혁에 독약일 수도 있다.

위기의식을 갖고 국정혼란과 이반된 민심을 수습해 '정부의 실패' 부터 막아야 한다.

변상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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