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다자대화 제의에 담긴 김정일의 노림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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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최근 중국의 다이빙궈 국무위원에게 “양자대화와 다자대화를 통해 핵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언급했다. ‘6자회담은 영원히 끝났다’면서 미국과의 양자대화만 고집하던 북한의 입장에 중대한 변화가 초래된 셈이다. 여기엔 국제사회의 제재, 특히 중국의 강경한 금수(禁輸)조치에 북한이 굴복했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지난 20년간 적어도 세 차례 이상 반복되어온 북한의 전술 패턴에선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대외위기를 조성, 내부 체제정비에 활용한 후 대외 환경정비에 나서는 패턴이다.

금년도 북한의 행동 양상은 1990년대 초 1차 핵 위기 때와 거의 유사하다. 당시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고 준전시상태를 선포했으며, 노동미사일도 발사했다. 미국의 영변 폭격 가능성까지 제기될 정도로 한반도는 초긴장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김일성은 이런 상황을 활용해 냉전 붕괴로 이완된 체제 결속을 꾀하면서 김정일을 국방위원장에 임명, 군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명실공히 후계구도를 완성시켰다. 또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초청, 핵 활동을 동결할 수 있다고 밝혀 북핵의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진다. 반발하는 김영삼 정부에 대해선 남북 정상회담을 제의했다.

지난 1년 반 가까이 북한은 남북 전면 대결 태세, 미사일과 핵실험 등 대외 위기국면을 조성, 이를 내부 체제정비에 활용했다. 헌법 개정, 국방위원회 재편, 군 수뇌부 인사이동 등을 단행해 세습 후계구도를 구축했다. 한반도의 긴장 수위를 한껏 높인 가운데, 북한은 90년대 초와 동일하게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초청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비핵화와 미국과의 관계 개선 의지를 클린턴에게 역설했다.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남한에 온 조문단은 갑자기 특사로 돌변, 공식적인 제의는 아니었지만 ‘정상회담’을 슬쩍 흘렸다.

90년대 초와 한 가지 다른 점은 중국 변수다. 김정일은 클린턴 전 대통령을 만나 양자대화만 언급하고 6자회담 복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중국에 대한 카드로 남겨둔 것이었다. 이를 간파한 미국은 북한의 6자회담 복귀 문제를 6자회담 의장인 중국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북한은 핵·미사일 실험 이후 중국을 철저히 배제했다. 김정일이 클린턴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만나고 이명박 대통령에게 특사까지 파견하는 가운데, 비슷한 시기 방북한 우다웨이 6자회담 대표는 중요 인사들을 만날 수 없었다. 한반도 주도권 상실을 우려한 후진타오 주석은 다이빙궈 국무위원을 특사로 파견한 것이다. ‘벼랑 끝 외교의 달인’ 김정일은 다자대화를 언급, 중국의 체면을 일부 세워준 것처럼 보이지만, 6자회담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의 10·4 공동선언에서 한반도 평화 문제를 ‘3자 혹은 4자’ 대화로 푼다고 밝혀, 3자가 누구인지와 관련해 중국을 긴장시켰던 것과 동일한 전술이다.

북한은 미국과의 양자대화를 통해 인도·파키스탄과 같이 미국과 국교를 맺으면서도 핵보유국의 지위를 얻으려 한다. 이를 위해 핵보유국 진입을 막으려는 국제공조를 깨려 한다. 미국에는 비핵화 가능성을, 한국에는 정상회담 가능성을 그리고 중국에는 6자회담 가능성을 각각 흘리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일본의 신정부에도 일본인 납치 문제와 관련해 유화 공세를 취하고 있을 것이다.

6자회담이 열린다고 핵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북한은 6자회담 중에도 2차례나 핵실험을 했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인은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손해’라는 점을 한국·미국·중국·일본 그리고 러시아가 한목소리로 북한에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다. 북한의 꼼수에 말려 누군가가 국제공조에서 이탈한다면, 우리는 북한의 세 번째 핵실험을 보게 될 것이며 북한의 핵 보유는 기정사실화될 것이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