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욱 대기자의 경제 패트롤] ‘공짜’ 공약에 냉정한 일본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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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신임 총리가 이끄는 민주당 정권이 지난주 출범했다. 하토야마 총리는 첫 각료회의에서 올 회계연도 추경예산 일부를 집행 중단토록 지시하는 등 민생과 복지를 중심으로 한 공약이행을 위한 발 빠른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중의원 선거에서의 압승과, 주요 일간지 여론조사에서 2001년 고이즈미(小泉) 내각 출범 당시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높게 나온 70%대의 내각지지율을 바탕으로 개혁작업을 강하게 밀어붙일 기세다. 내각 지지 여부와 함께 물은 주요 공약에 대한 이행 필요성에 대한 조사에서 찬성률이 높게 나온 것도 하토야마 내각의 개혁 행보를 더욱 가볍게 해 주고 있다. 하지만 하나, 예외가 눈에 띄었다. 고속도로 무료화 문제다.

고속도로 무료화는 민주당의 해묵은 공약 중 하나다. 교통비가 비싸기로 유명한 일본에서도 고속도로 통행료는 대단히 비싼 걸로 정평이 나있다. 한 차로 3명 이상이 함께 가지 않는 바에는 KTX보다 3배쯤 비싼 신칸센을 타는 게 낫다고 할 정도다. 그러니 불만이 나오는 건 당연하고, 집권을 노리는 정당이 이를 공약에 넣은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정작 집권 후 여론조사에선 의외의 반응이 나타났다. 고속도로 무료화 공약을 이행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응답자 중 약 3분의 2(마이니치신문 63%, 아사히신문 67%)가 반대한다고 밝혔다. 찬성은 24%(아사히)∼33%(마이니치)에 머물렀다. 이제부터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그렇다고 다른 명목으로 벌충하겠다는 것도 아닌 ‘무료화’ 공약에 대한 일본 국민의 반응이 놀랍다. 무료도 좋지만 고속도로 무료화에 따른 교통량 증가, 그로 인해 야기될 교통체증과 물류시스템의 혼란, 온실가스 감축에 역행한다는 시대정신의 문제 등 역기능이 더 클 것으로 본 국민이 훨씬 많다는 얘기다. ‘건설비를 충당하려는 목적을 달성했으면 무료화하는 것이 국민에 대한 서비스’라며 공약 이행을 다짐하는 민주당을 머쓱하게 만드는 여론조사다.

가관인 것은 자민당 시절에는 무료화에 극력 반대하다가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뒤엔 ‘자체 조사결과 물류 비용이 크게 하락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나선 국토교통성의 태도다. 그야말로 혼이 없는 공무원의 전형이다. 일본 국민이 공무원개혁을 맨 앞에 내세운 민주당을 선택한 이유를 알 듯하다.

무료의 유혹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현실적 제약과 역기능을 함께 생각하려는 자세, 일본 국민이 보여준 게 그런 모습 아닌가 싶다.

박태욱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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