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정책 없이 개발만 … 지금도 골머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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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 달러 수출 달성, 1인당 국내총생산(GDP) 1000달러 돌파….

1970년대 한국 경제를 이끈 남덕우 전 총리가 회고록을 펴냈다. [신인섭 기자]

1970년대 한국 경제가 남긴 찬란한 유산들이다. 지금이야 별것 아닌 일로 보이지만 당시로선 세계가 놀라고, 스스로 가슴이 벅찼던 순간들이다. 그 뒤에 항상 남덕우(85)씨가 있었다. 재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내며 한국 경제를 이끌어 온 그가 회고록을 썼다. 제목은 『경제개발의 길목에서』.

그 길목에서 이뤄진 정책 결정의 과정, 고민과 아쉬움, 그리고 후대를 위한 조언까지 담았다. 회고록을 보도한 중앙SUNDAY(9월 20일자 7면)에서 남 전 총리는 “개발 연대의 경제정책을 후대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그들이 선대의 공과를 거울로 삼는 자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경제정책의 이면=교과서적인 정책을 고집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차선책을 찾았다. 대신 시장원리가 최대한 손상받지 않도록 노력했다. 70년대 금융 탄압의 사례로 꼽히는 ‘국민투자기금 채권’이 대표적이다. 그는 “내 딴에는 금융사들을 폭풍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어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자금이 필요한데, 그대로 두면 금융사들이 엄청난 대출 압력에 시달릴 것으로 판단했다. 그럴 바엔 은행에 리스크가 적은 정부 채권을 사도록 의무화하는 게 금융 원칙에 좀 더 부합한다고 봤다는 설명이다.

대외 메시지 관리는 작은 부분에도 신경 썼다. 73년 석유 파동 때는 외환사정이 절박한데도 3000만 달러의 불량 채무를 조기 상환해 여유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회고록은 가능한 사실 관계 위주로 담담하게 썼지만 에피소드도 꽤 있다. 대중 교역의 시발점은 79년 고추 흉작이었다. 조달청은 중국 고추 수입을 필요로 했고, 이왕 가는 김에 섬유와 가전제품을 싣고 가도록 지시했다. 그 배에는 포니 자동차 한 대도 실었다. 경남 거제에 대규모 조선소가 들어선 데도 사정이 있다. 원자력발전소를 육지에 세우면 주민 반발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바다에 대형 부교를 만들어 발전시설을 올려놓자는 아이디어가 바탕이 됐다.

79년 원유 추가 공급 요청을 받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는 “한국 새마을운동을 하는 농민 몇 사람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17명이 파견됐고, 사우디는 한국에 원유를 추가 공급했다. 종업원 지주제를 ‘우리사주’로 부르게 한 것도 그였다. 애사심과 노사 협력을 염두에 둔 작명이었다.

◆지도자의 힘=박정희 정부에 각을 세웠던 ‘서강학파’의 일원이던 남 전 총리는 45세인 69년 10월 재무부 장관에 발탁됐다. 그에게 박 전 대통령은 “남 교수, 그동안 정부가 하는 일에 비판을 많이 하던데 이제 맛 좀 봐”라고 농을 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정치는 내가 맡을 터이니 임자들은 경제개발에만 전념하시오’라는 대통령의 말이 큰 힘이 됐다”고 썼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을 ‘무엇이든 해내는 사람을 좋아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정치적 국면 전환을 위해 번번이 경제장관을 바꾸는 것은 대통령 자신에게 확고한 목적 의식이나 경륜이 없거나 사람 보는 눈이 없다는 걸 의미한다. 정책의 일관성이 없다면 그것은 장관보다 대통령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과 마지막 골프를 했다고 회고한다. 박 전 대통령은 그날 따라 공이 잘 맞았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이 생애 마지막 라운딩을 한 홀의 기록은 ‘파’다.

◆아쉬움과 조언=아쉬움도 많다. 대표적인 게 부동산정책이다. “토지정책을 수립하지 않고 개발정책을 추진한 결과 부동산 투기와 땅값 상승이 언제나 정부를 괴롭혔고, 오늘날에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토지의 사유권은 인정하되 이용권을 사회화하는 방향으로 토지정책을 확립했어야 했다.”

그는 72~74년에 시행한 기업 공개와 기업 집중 및 부실화 방지 정책을 일관적으로 추진하지 못했기 때문에 97년 외환위기를 불러오게 됐다고 지적했다. 구조조정을 일관되게 추진하지 못한 점, 경제 교육이 부족한 점 등도 아쉬움으로 꼽았다.

외환위기 때 국제통화기금(IMF)의 정책도 그에겐 아쉬운 대목이다. 그는 “IMF가 단순한 외환위기를 경제위기로 몰고 갔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는 지금까지 동해 건너 일본과 태평양 건너 미국을 바라보며 살아왔지만 이제 서해 건너편의 중국을 위시해 동북아로 눈을 돌릴 때가 왔다”고 했다. 연해주 개발은 통일 후 북한 주민의 대거 남하를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원로의 고민은 끝이 없다. 회고록의 마지막은 이런 물음으로 끝난다.

“국가 이념이라는 정신적 구심점 없이 국민 통합이 가능할까.”

김영훈 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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