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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 사령관 무장해제시킨 공산당원 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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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호 33면

1949년 3월 25일 시위안(西苑)비행장에서 민주당파 인사들이 베이핑으로 향하는 마오쩌둥(오른쪽에서 셋째) 일행을 맞이하고 있다. 김명호 제공

베이핑(北平:현재의 베이징)과 톈진(天津) 지역 전투는 랴오선(遼瀋)·화이하이(淮海)와 함께 국공전쟁의 3대 전역(戰役) 중 하나였다. 이 지역의 국민당군 총사령관은 항일전쟁에서 명성을 떨친 푸쭤이(傅作義)였다. 그의 병력 50만이 베이핑과 톈진을 포함한 사방 500㎞에 포진해 있었다.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장자커우(張家口)까지 폭이 좁고 긴 지역들이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31> 新중국 건국 전야② 베이핑 입성

중난하이(中南海)에 지휘부를 차리고 있던 푸쭤이는 동북을 점령한 후 방향을 튼 동북야전군과 화북야전군의 공격에 직면했다. 푸는 장제스의 직계가 아니었다. 한번 쓴 사람은 끝까지 믿어야 한다고들 하지만, 의심해서 크게 손해 본 적도 없다 보니 두 사람 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랴오선 전역에서 승리한 공비(당시 국민당 측에서는 인민해방군을 이렇게 불렀다)들이 휴식을 취하고 전력을 정비해 산하이관을 넘보려면 3개월은 지나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화동(華東)과 중원(中原) 지역에서는 화이하이 전역이 진행 중이었지만 장은 푸의 병력을 화동 지역으로 이동시키지 않고 베이핑·톈진·장자커우 일대를 고수하게 했다.

마오쩌둥은 이들의 허를 찔렀다. 동북 점령 2주 후인 11월 18일 동북야전군에게 탕산(唐山)·탕구(塘沽)·톈진을 포위해 국민당군이 해상을 통해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차단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동시에 신화사와 각 방송을 통해 상대방을 교란시키는 뉴스를 계속 내보냈다.

1948년 10월 마지막 베이핑 방문을 마치고 떠나는 장제스(가운데). 오른쪽은 푸쭤이.

동북야전군 80만 명과 화북야전군 13만 명 외에 참전이 가능한 지방부대를 동원해 공세를 퍼부었다. 거의 모든 전투에서 인민해방군은 승리를 거뒀다. 국민당의 지휘관들은 생포되거나 도주하거나 투항했다. 관문인 산하이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중앙군사위원회에서 직접 지휘했지만 1949년 1월 3일부터 12일까지 톈진 외곽의 국민당 부대를 완전히 소탕한 후에는 모든 작전과 도시의 접수에 관한 권한을 린뱌오에게 일임했다.

1월 14일 해방군은 보병·포병·공병과 전차부대를 동원한 연합작전을 펼쳐 하루 만에 톈진을 점령했다. 국민당군 13만여 명을 괴멸시키고 톈진경비사령관 천창제(陳長捷)를 생포했다. 장제스는 탕구의 국민당군을 철수시켰다. 말이 좋아 철수지 실은 도망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베이핑이었다. 해방군 대군은 베이핑을 포위해 국민당군 25만 명을 고립시켰다.

마오쩌둥이 화이하이 전역을 먼저 일으킨 것은 남쪽의 국민당 군대가 화북 지역으로 이동할 기회를 차단하고 푸쭤이의 군대를 북쪽에 묶어두어야 베이핑 입성이 용이하다는 전략적 판단 때문이었다.

베이핑은 고도(古都)였다. 국민정부가 난징을 수도로 정하는 바람에 원래의 명칭을 상실했지만 도시 전체가 세계적인 문화유산이었다. 어차피 이긴 전쟁, 포격이라도 가했다간 훗날 무슨 오명을 뒤집어 쓸지 몰랐다. 마오는 “적을 격리시키되 포위하지는 말고(隔而不圍), 포위하되 공격하지는 말라(圍而不打)”는 전략을 택했다. 평화적 입성을 위해 지하당원들을 총동원했다. 푸쭤이에 대한 공작을 펴나갔다. 푸의 딸도 공산당 지하당원이었다. “장제스는 자신을 돌볼 여력도 없다. 지원병은 오지 않는다. 공산당의 평화적인 담판 조건을 받아들여라. 전화(戰禍)를 면한 시민들은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을 것이다”라며 부친을 설득했다. 분위기를 눈치 챈 장제스는 차남 장웨이궈(蔣偉國)를 파견해 일부 병력이라도 칭다오로 공수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또 쓸데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고수하며 후원병이 오기를 기다려라. 성공하지 못하면 죽기라도 해서 혁명대업을 완수해라”는 친필 서신을 공중에서 투하해 지휘관들을 격려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1월 21일 인민해방군과 푸쭤이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됐다. 다음날 국민당군 20만 명이 교외로 철수했다. 이들과 베이핑에 잔류한 5만 명은 해방군에 편입됐다. 1월 31일 해방군은 베이핑에 입성했다. 난징의 장제스는 ‘시력 악화’를 이유로 총통 직을 사직했다.

마오쩌둥·주더·류샤오치·저우언라이·런비스(任弼時) 등 5명의 서기들도 3월 23일 오후 중국공산당의 마지막 농촌 지휘부 시바이포(西柏坡)를 떠났다. 목적지는 베이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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