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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단군신화 빼앗아 간다는 건 오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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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신화와 역사가 맞닿는 순간은 아득한 세월을 거슬러 문명의 시원을 만나는 환희의 시간이다. 하지만 수 천 년 전의 자유로운 고대인들을 현대적 의미의 국경 속에

가둘 수 있을까. 최근 내한한 중국사회과학원의 예수셴(葉舒憲·55) 교수는 예민한 논쟁의 중심에 있는 신화학자다.

그의 책 『곰 토템: 중화조선신화탐원(中華祖先神話探源)』은 한국에서 ‘단군신화 빼앗기’로 여겨졌다. 이화여대 중문과의 정재서(57) 교수는 중국의 신화 형성에

한국 신화가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로 중국에서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하지만 정 교수와 예 교수는 모두 신화 시대의 국경을 인정하지 않는다.

국수주의를 배격하는 입장에서 문화적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이다. 한국과 중국을 대표하는 신화학자가 만났다. 대담은 16일 본사 편집국에서 2시간 넘게 진행됐다.

한국과 중국의 대표적 신화학자들이 16일 본사 편집국에서 만나 대담을 나눴다. 정재서(왼쪽)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와 예수셴 중국사회과학원 교수. 두 사람은 “민족이 분화되고 국가가 형성되기 전의 신화시대를 국수주의적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국경 없이 교류했던 신화 시대의 상상력을 되살리자는 바람이다. [오종택 기자]

# 신화의 귀환,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정재서(이하 ‘정’)=신화가 귀환하는 시대입니다. 신화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소설 『해리포터』『반지의 제왕』 등이 인기를 끌지요. 하지만 서양 신화 중심이라는 게 아쉽습니다. ‘신화의 귀환’에는 좀 더 깊은 문화적 원인이 있어요. 21세기에 들어와 상상력과 이미지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스토리텔링’이나 ‘내러티브’가 지닌 힘에 큰 관심을 갖게 됐지요. 이건 본래 인류가 오랜 세월 축적해 온 신화의 힘이었습니다.

▶예수셴(이하 ‘예’)=서양에선 과거 기독교 신앙에 의해 억압됐던 문화적 전통이 최근 복귀하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게 ‘신화 붐’과 연결되지요.

▶정=신화를 문화산업과 연관해 경제적 가치로만 환산하는 경향이 아쉽습니다. 신화는 문명의 자양분이었고, 그 속에서 인류는 여전히 미래를 위한 지혜를 얻을 수 있어요.

▶예=산업화 시대 경제는 석유·석탄 같은 천연 자원에 의존했지만, 정보화 사회에선 문화적·정신적 자원에 의존합니다. ‘영혼을 상실한 시대’에 인류는 신화를 통해 새롭게 정신 문명을 회복해야 합니다.

# 국수주의적 신화 독해를 경계한다

▶정=제가 2007년 발표한 ‘중국신화 속의 한국신화’라는 논문이 중국 네티즌과 일부 학자들로부터 큰 반발을 산 일이 있어요. “한국이 중국신화를 빼앗아 간다”며 격렬한 비난이 일었죠. 한국 등 인접 지역과 문화적 상호작용을 통해 중국 신화가 다원적으로 형성됐다는 논지였는데 오해가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 예수셴 교수의 책 『곰 토템』이 나오자 한국 학자와 네티즌이 반발했어요. 중국 신화에서 ‘곰 토템’의 흔적을 찾는 책이었는데 한국에선 “단군신화까지 중국이 빼앗아 간다”고 받아들였습니다. 아이러니컬한 상황이었죠. 저와 예 교수는 국수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문화적 다원주의를 긍정하는 학자들입니다. 그런데 서로 상대방 국가에선 극단적 종족주의자로 받아들여지는 듯한 상황이 연출됐어요. 최근에도 한국 언론에 예 교수의 ‘곰 토템론’을 비판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예=큰 오해가 있습니다. 3000~5000년 전의 신화를 현대의 국가·민족 관념으로 봐선 안 됩니다. 책에서 언급한 ‘황제(黃帝·중국신화에 나오는 문명의 창시자. 중국인의 시조로 숭배됨)시대’에는 ‘중국’이라는 나라조차 없었던 시기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수렵생활을 했고 자연스레 동물 토템을 형성했을 뿐이죠. 그들에게 어떻게 현대의 국가와 민족 관념을 적용할 수 있습니까.

▶정=한국 학자들은 중국 황제족의 곰 토템설을 우위에 두고 단군신화를 하위에 두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습니다.

▶예=중국 신화학자의 입장에서 논의하다보니 일부 표현에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책의 전체 취지나 기본 입장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곰 토템에 관한 저의 연구는 중국과 한국에 국한된 게 아닙니다. 북유럽과 일본의 아이누족 등 모든 지역을 포함하고 있어요. 황제와 단군은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 관계에서 논의된 것입니다.

▶정=오늘날의 시각에서 신화를 역사화하는 건 위험한 생각입니다. 중국 사회과학원에 몸 담고 있는 예 교수의 주장이 ‘단군 신화’에 대한 중국의 공식적 입장이라고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동북공정’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정치적 의도가 엿보인다는 건데….

▶예=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 곰 토템 연구에 국가로부터 받은 연구비는 전혀 없습니다. 확인해 봐도 좋아요. 제 연구엔 어떠한 정치적 의도도 없습니다.

▶정=중국 내부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예=제 학설을 중국에선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에요. 중국인은 용의 후예라고 생각하는데, 웬 곰 토템이냐는 반응이었죠.

▶정=학설에 대해 찬반양론의 논쟁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오해와 편견을 불식한 객관적인 토론이라야 학문이 발전할 것입니다.

▶예=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신화연구는 학자의 순수한 의도와는 달리 종족주의에 의해 필연적으로 이용됩니다. 오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죠.

▶정=지금의 글로벌 세계에선 국경 없이 교류했던 신화 시대의 상상력을 되살리는 게 중요합니다. 객관적 신화 탐구를 통해 자유롭게 문화를 공유하고 누렸던 과거 동아시아의 연대감을 회복하는 게 필요합니다.  

정리=배노필 기자 , 사진=오종택 기자

◆정재서 교수=1952년생.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서울대 중문과 졸업, 동 대학원 박사.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와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에서 공부했으며 신화와 도교를 연구해 왔다. 저서에 『불사의 신화와 사상』 『도교와 문학 그리고 상상력』 『정재서 교수의 이야기 동양신화』 『사라진 신들과의 교신을 위하여』 등.

◆예수셴 교수=1954년생. 중국 사회과학원 교수(문학연구소 비교문학실 주임). 하이난다오(海南島) 출신. 쓰촨(四川)대 박사. 미국 예일대와 타이완 중흥대에서 강의했으며 중국 신화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에 『시경의 문화해석』 『천의 얼굴을 가진 여신』 『중국신화철학』 『곰 토템-중화조선신화탐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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