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 코소보에서 평양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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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미국의 대북정책조정관 윌리엄 페리가 평양을 방문하는 시점이 의미심장하다.

지금 예상되는 한반도 정세의 변화를 역동적인 국제정치의 배경에서 살필 필요가 있다.

첫째, 코소보 사태다.

발칸분쟁은 미국의 절대적인 주도로 정착되는가 싶던 포스트 냉전체제가 심각한 위기를 맞았음을 의미한다.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 의 지원를 받고도 지역분쟁 하나를 해결하지 못한다.

91~92 걸프전쟁 때와는 대조적이다.

둘째, 이 틈에 러시아는 미국의 유일한 슈퍼 파워 지위에 도전하고 있다.

러시아에 나토군의 중국 대사관 오폭은 희소식이고 중국은 대사관 오폭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코소보 사태의 해결이 미국의 지도력 강화로 연결되지 않도록 러시아와 보조를 맞춘다.

셋째, 6월로 예정된 김영남 (金永南)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중국 방문과 북한.러시아간 새로운 우호조약 체결로 북방 삼각관계가 강화되고, 따라서 북한은 고립의식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되찾을 전망이다.

북한의 이런 자신감 회복과는 대조적으로 미국의 코소보 군사개입은 공군력의 상당부분을 발칸반도로 돌려 유사시 한반도에서 미군의 전쟁수행능력 감소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 한국에는 하나의 불안요소가 된다.

발칸사태가 장기화하면 걸프지역과 한반도에서 2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하는 '윈 - 윈전략' 에 차질이 올 수도 있다.

거기에 동북아시아에서는 미.일 동맹관계의 강화와 미국 미사일 기술의 중국 유출사건,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WTO)가입 지연이 미.중관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미.중관계의 악화가 한도를 넘으면 한반도의 긴장완화에 중국의 협력을 얻기가 어려워진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소련 붕괴 이후 한국이 러시아를 푸대접해왔다는 불만에서 한반도정책을 남북 등거리 외교로 재조정하고 있다.

러시아가 기회있을 때마다 러시아의 참여없이 한반도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고 강조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러시아는 4자회담을 6자회담으로 확대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김대중 (金大中).옐친 대통령의 정상회담 주요 의제 중 하나다.

페리는 이렇게 미국의 국제적 지위가 흔들리고, 동북아시아에서는 21세기에 예상되는 미.중 대결 모형이 제시되고, 러시아가 한국 문제에 발언권을 요구하고 나서는 복잡한 환경에서 북한을 방문하는 것이다.

오히려 잘된 일이다.

예상되는 모든 변화와 문제가 노출된 상태에서 미국의 대북정책이 재검토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페리는 북한에 빌 클린턴 대통령의 친서뿐 아니라 金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小淵惠三) 일본 총리의 메시지도 전달한다.

그는 사실상 한.미.일의 특사이기도 해 그의 보고서는 세 나라의 대북정책을 반영한다.

그 기조는 포용정책이고, 방법은 일괄타결이다.

한국과 미국이 북한에 요구하는 것은 핵개발 포기를 재확인하고, 미사일 개발.수출의 자제를 약속하라는 것이다.

북한에 제시하는 당근은 북.미, 북.일관계 개선 및 수교, 북한에 대한 미국의 경제제재 완화, 북한 농업의 구조적 개혁에 대한 지원 등이다.

그러나 김정일 (金正日)에게 중요한 것은 한국과 미국이 북한체제의 안정을 보장하는 것이다.

김정일이 그런 안전보장을 믿도록 하는 것이 페리의 무거운 책임이다.

북한은 한국의 개각에서 '미스터 햇볕정책' 이 통일부장관에 임명된 것이 갖는 의미를 읽어야 한다.

통일부장관 한 사람이 대북정책에 미치는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그 인사에는 햇볕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의지가 실려있다.

한반도 문제는 국제정치의 진공상태에서 해결되지 않는다.

미.러관계와 미.중관계, 발칸과 중동사태의 배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발칸사태가 포스트 냉전체제를 뒤흔들어놓고, 한반도 주변 4강의 관계가 요동치는 가운데 페리가 평양을 방문하는 것은 차라리 반가운 우연이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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