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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지도가 바뀐다] 13. '진보평론' 그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영국의 좌파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지난해 "마르크스가 '사망 10년' (동구 사회주의 붕괴 후 10년) 만에 되살아나고 있다" 고 말했다.

때마침 우리의 진보 지식인들은 계간 '진보평론' 을 내겠다며 깃발을 들었다.

왜 다시 마르크스인가.

궁금증을 풀기 앞서 정진상 (41.경상대 교수.사회학) 교수의 말처럼 "좌파.진보의 얘기를 공개적으로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시대의 도래" 는 정말 의외다.

"우리 사회가 비록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분명 앞으로 가고 있음을 감지할 만한 변화" 라는 그의 진단도 새롭게 다가선다. 한국 진보세력의 집결처로서 현재 창간준비 중인 잡지 '진보평론' 의 2백여명 참여자들은 한결같이 '자본운동의 영원한 천국' 을 실현하겠다는 희망이 무산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출범 선언문에서 옮겨오자면 "사회주의의 붕괴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전성시대를 초래할 것 같았지만 과잉생산과 과잉축적의 모순에 빠져 위기국면" 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대중의 힘에 대한 재신뢰론' 까지 등장한다.

이 잡지 편집위원장인 김세균 (52.서울대 교수.정치학) 교수의 얘기로는 "세계자본주의.신자유주의.시장근본주의의 허상을 본 마당에서 우리는 야만에의 굴복이냐, 아니면 희망의 재창출이냐는 갈림길에 서 있다" 는 것. 공동대표의 한사람인 손호철 (47. 서강대 교수.정치학) 교수는 "이에 진보진영이 그간의 패배의식과 이데올로기적 혼란에서 벗어나야 한다" 는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

물론 우리에게서 진보성향의 잡지가 처음은 아니다.

80년대 '현실과 과학' (윤소영.서관모 교수 등 주도) 과 90년대 '이론' (김세균.김수행.손호철 교수 등 주도) 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에 대해 김세균 교수는 "진보지 시작의 시기가 늦은데다가 90년대 '포스트주의' (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마르크시즘 등) 로 초래된 탈정치화와 키치적 문화현상에 눌려 빛을 잃고 말았다" 는 진단을 내놓는다.

'진보평론' 의 '새맛' 얘기는 바로 여기서 나온다.

'옛맛' 으로는 겨우 살아난 마르크스를 진정으로 살아 숨쉬게 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김세균 교수는 이를 "풍요로운 진보의 실현을 위해 인간 삶의 여러 영역을 동원" 하는데서 찾고 있다.

강내희 (48.중앙대.문화연구) 교수의 분석 또한 의미있다.

"한국의 IMF는 이제 더이상 자본이 대중을 속이기 어렵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다만 이 시점 진보운동의 성패는 젊은 대학생 지식대중의 관심도에 달려 있다. "

우선 '진보평론' 이 이론진영과 실천진영의 만남을 시도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특히 이론 쪽의 경우 '현실과 과학' '이론' 그룹에 속했던 대다수의 학술연구가, 실천 쪽에서도 노동운동가뿐 아니라 법률.의료 관계자들까지를 다 망라하고 있다.

이는 국내외 어느 진보운동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 '진보평론' 의 이같은 총집결 체제가 '외연 확장' 에 기여할지는 몰라도 '내포 심화' 에 장애물이 될 우려도 없지 않다.

하지만 서관모 (46.충북대.사회학) 교수는 "허약한 이론으로는 운동에 힘을 보탤 수 없고 지금은 운동과잉에 이론부재 상태" 라고 전제하면서 "두 진영의 유기적 결합이라는 용어 자체가 좋아보인다" 는 평이다.

실천진영의 박장근 (39.새로운 정치조직 건설을 위한 예비모임 소속) 씨의 경우 "현장운동가도 이론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팽배한데 이론진영은 여전히 무기력하다" 며 질타를 가하는 관점에 서 있다.

'새맛' 부여의 또 다른 변수는 신사회운동 또는 시민운동의 진보적 수용여부다.

단순화해서 말하면 이는 종래 자본.계급의 모순으로 사회를 파악했던 구좌파노선과 성차별.인종.환경문제 등 신사회운동으로 나아간 신좌파노선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다.

공동대표 최갑수 (45.서울대 교수.서양사) 교수의 표현으로는 '구좌파와 신좌파의 어울림' - . 하지만 이종회 (41.사회진보연대 사무처장) 씨의 견해는 일단 부정적이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일정 이상 성장을 하고 나면 기존 자본과 정권의 '하위 파트너' 로 전락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는 것이다.

그는 이를 '시민없는 시민운동' 에 불과하다는 비판으로 이어간다.

이에 박장근씨는 "전투적 노동운동과 진보적 시민운동은 길항 (拮抗 : 서로 버티고 대항하는) 관계다.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은 구좌파적 틀에서 벗어나야 함을 의미한다" 는 입장. 이용주 (32.서울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씨도 "진보진영 내 우파는 더 이상 진보적이지 않다" 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도 "이론진영의 의사소통 대상을 기존의 노동자진영에 국한 시켜서는 안된다" 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조희연 (43.성공회대.사회학) 교수의 시민운동에 대한 접근법도 눈길을 끈다.

"시민운동은 분열.분화해야 한다. 현재 일고 있는 신사회운동을 진보의 새 영역으로 부를 필요성이 있다. 비강단.비제도권 지식인의 역동성과 전위성을 수렴하지 않으면 안된다. " 그의 함축적인 표현대로라면 양측이 만나는 접점은 '두개의 심화' , 즉 '구좌파의 개방 심화' '신좌파의 진보성 심화' 다.

그렇다고 해서 구좌파적 노동운동의 중요성을 격하시키는 것에 대해 누구도 동의하지 않는다.

이황현아 (27.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 사무국장) 씨는 "변혁지향적 발전논의가 심화되고 있는 현시점에도 노동에 대한 자본의 음모는 계속되고 있다" 며 "총자본의 궁극적 요구사항은 제도권 노동과 주변 노동의 분할전략" 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김세균 교수의 견해도 비슷하다.

"한국 자본주의의 행태로 볼 때 어차피 사회운동의 기본 틀이 노동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는 관점이다. 아무튼 이번 진보진영의 재집결이 새로운 지평 열기로 이어지기 위해선 남구현 (43.한신대.사회복지학) 교수의 지적대로 "현존 사회주의의 실패를 뛰어넘는 전략이 필요하다" 는데 다들 동의해야 할 뿐, 달리 도리가 없어 보인다.

닥쳐올 무더위가 한풀 꺾일 즈음인 8월말 '진보평론' 창간호는 우리 앞에 던져질 것이다.

'마르크시즘의 오늘과 내일' 을 특집으로 한 이 학술지는 과연 우리 사회의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리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적어도 이황현아씨가 지적하는 것처럼 "90년대말 현시점의 대중적 갈증의 실체가 뭔지" 는 일깨워줄 것으로 여겨진다.

허의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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