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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감지 않는 '박정희' 논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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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박정희 정권에 대한 학계의 평가 논쟁에 다시 불이 붙고 있다. 최근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 전대통령과의 화해를 공식화했기 때문이다.

이 논쟁은 한국사회의 다양한 세력에 대한 정치적 평가와 직결돼 있다. 때문에 현재 우리 사회에 대한 평가이자 동시에 많은 국민들의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박정희로 상징되는 발전주의 역사관의 현재적 정당성, 국민정부 개혁의 평가여부 등 다양한 현실적 주제와 착종돼 전개될 수 밖에 없다. 학계의 논의를 쟁점별로 정리해 본다.

◇ 분분한 박정희 평가 박정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대표적 입장은 '개발독재 불가피론' .박정희의 리더쉽이 경제 근대화의 동력이었으며 독재는 일종의 필요악이라는 관점이다.

두번째는 단계론적 접근을 통해 조건부로 긍정하는 경우다. '민주주의와 발전의 양립 불가능성' 을 전제로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분리해서 단계론적으로 봐야한다는 김일영 교수 (성균관대.정치학)가 대표적.

"권위주의와 발전은 서로 '선택적 친화력' 이 있다" 며 "당시는 오늘날과 달리 국가주도형 발전전략이 옳았다" 고 평가한다. 이같은 조건적 긍정에는 물론 이제 그것은 '시효가 만료된 망령' 일뿐 아니라 "지금의 문제를 박정희에게 전가하는 것도 잘못" 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반면 부정적 입장은 손호철 교수 (서강대.정치학) 처럼 박정권의 성격을 '친독점자본 민중억압성' 으로 규정한다.

"박정권의 억압적 '개발독재' 가 고도성장을 가져온 중요한 요인" 인 것은 틀림없지만 규범적 평가에선 명백히 민중억압적이었다고 비판한다.

한걸음 나아가 김대환 교수 (인하대.경제학) 는 개발독재의 구조적 왜곡을 지적하면서 부정적 평가를 내린다.

"경제개발은 근대화의 필요조건에 불과하다" 는 전제 아래 "독재가 오히려 효율의 기본바탕인 합리적 정신을 억압해 체제 효율성은 날로 떨어져, 결국 긴급조치나 유신체제와 같이 발전을 가로막는 극단적인 비합리적 체제로 전환했다" 고 분석한다.

최장집.임혁백 교수 (이상 고려대.정치학) 도 국가중심의 발전지상주의적 산업화가 야기한 역사적 구조가 현재의 IMF 체제의 주범이었다며 그것이 역사적으로 불가피했다 하더라도 결코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평가한다.

◇ 金대통령의 화해 정당한가 김대통령이 피해 당사자로서 화해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평가해야 하며 특히 지역갈등을 해소하는데 적절한 일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그 평가가 불가피하게 '역사적' 성격을 가진다는 점. 학계에서 가장 우려하는 것은 자칫 권위주의 망령을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최장집 교수의 지적처럼 박정희식의 개발독재 모델이 복권되거나 박정희 헤게모니에 굴복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것.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를 총노선으로 하는 국민정부가 자칫 국가중심의 발전모델로 회귀할 수도 있다는 임혁백 교수의 지적도 같은 맥락이다.

반면 "모든 독재자가 경제개발에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고 전제한 한상진 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원장) 는 다소 다른 입장을 보인다.

"화해가 단순한 타협이 아니라 부국강병의 박정희 역사관을 넘어서 보다 큰 역사관 속에서 자리매김된다면 미래지향적 화해는 정당성을 갖는다" 고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 전제되어야 할 것은 과연 국민정부가 박정희 발전모델을 넘어선 대안 모델을 제시했느냐는 점. 다시 말해 박정희 권위주의의 유산을 아직 철저하게 청산하는 개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태에서 화해는 자칫 '타협' 이 될 수 있다는 것. 이런 이유로 시기상조론을 개진하는 견해가 적지 않다.

조희연 교수 (성공회대.사회학) 는 아직도 냉전 권위주의 세력과 냉전 규율사회체제가 온존하고 있는 가운데 섣부른 화해 시도는 오히려 시민사회의 분열을 가져와 사회갈등을 새롭게 촉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손호철 교수는 "아직 권위주의 유산을 청산하는 개혁이 완성되지도 않았고 또 민주화운동 기념관 하나도 제대로 없는 상황에서 섣부른 화해를 시도할 경우 역사관의 혼돈은 물론 국민정부는 결국 뒷통수를 맞는 결과가 될 것" 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화해의 정당성과 필요의 문제는 현정부의 개혁에 대한 평가와 맞물려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논쟁 어디까지 왔나]

박정희 평가에 대한 학계의 본격논쟁은 93년 후반기부터. 한국정치학회가 이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한데 이어 한국행정학회 의뢰로 안병만 교수 (외대.행정학)가 2백50명의 정치.행정학자를 조사한 결과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아 관심을 모았다.

핵심쟁점은 권위주의 정치체제와 근대화와의 상관관계. 다시 말해 권위주의 '때문에' 발전이 이뤄졌느냐, 아니면 권위주의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이 이뤄졌느냐는 것.

이에 앞서 93년 3월 코펜하겐 유엔사회개발 정상회담에서도 박정희의 국가중심 발전전략에 대한 논의가 전개됐다. 당시 NGO포럼에 참석한 김대환 교수가 정부의 입장과 달리 박정희 개발독재를 비판해 국내로까지 논쟁이 비화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93년 가을 '역사비평' 에서 김대환.손호철.안병만 교수 등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토론회를 개최했다. 특히 계간 '대화' 95년 여름호에 최장집 교수가 '박정희 정권과 한국 현대사' 라는 글을 통해 박정희 정권이 군사주의를 경제발전과 결합해 폭발적 결과를 가져온 반면 민주화의 과제를 떠안은 문민정부가 민주개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등 박정희 정부를 김영삼 정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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