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바다' 서초벼룩시장 전문상인들이 파고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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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난 15일 오전 7시 서울서초구청옆 도로변. 매주 토요일 서초벼룩시장이 서는 이곳은 개장을 세시간이나 남겨두었는데도 벌써 몇몇 사람들이 넓은 자리에 빼곡이 물건을 진열해놓고 있다. 3~4평 공간에 행거까지 동원해 산더미처럼 헌 옷가지를 펼쳐 놓아 한눈에 전문상인임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

양재역 반대쪽 구석에 돗자리 한 장을 깔고 판을 벌린 최모 (63) 씨는 "새벽 6시에 나왔는데도 이 자리밖에 구하지 못했다" 며 "중앙 요지는 매번 똑같은 장사꾼들이 독차지한다" 고 짜증스럽게 말했다.

서울서초구청이 '아나바다 (아껴쓰기 나눠쓰기 바꿔쓰기 다시쓰기) 운동' 의 일환으로 마련한 서초벼룩시장. 이곳이 인기를 모으며 전문상인들이 대거 몰려와 당초 의도를 크게 변질시키고 있다.

밤을 새우며 자리 다툼을 벌이는가 하면 일반인의 물건을 싼 값에 가로채 그 자리에서 마진을 붙여 되파는 중간상 (?) 까지 하고 있는 것. 잔뜩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날 오후 2시까지 이곳에서 판을 벌린 사람들은 모두 3백여 명. 이 가운데 일반참여자는 절반에도 못미쳐 보였다.

판을 벌리는 일반인들이 늘어가자 대형 옷가방을 둘러멘 사람들이 눈에 띄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사들인다. 서초벼룩시장에 물건을 내놓는 사람들은 주로 부유층이 많다는 서울 강남지역 거주자. 유명브랜드 의류 등 질 좋은 물건이 많다는 것을 노려 아예 지방에서 올라온 원정상인까지 있다.

광주에서 왔다는 이모 (32) 씨는 "이곳에는 새 것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좋은 물건이 많다" 며 "매주 올라와 큰 가방 다섯개 정도 물량을 구입해 광주지역 노점상에 되판다" 고 말했다.

아이들이 안 입는 옷을 가지고 나왔다는 김양순 (35.서울 강남구 청담동) 주부는 "물건값을 깎아 달라고 해서 싸게 팔았더니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붙여 팔았다" 며 불쾌해 했다.

서초벼룩시장에서는 새 물건은 판매금지. 그런데도 헌 물건 사이에 새 것들을 섞어 판매하기도 했다. 심지어 가격표가 달린 가죽가방이나 포장 된 채 진열된 옷까지 있을 정도. 일부 상인들은 포장을 벗겨낸 신품으로 호객행위까지 나서고 있었다.구청직원 서너 명이 질서 유지활동을 펼치고 있지만 전문노점상에 대한 규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재생화장지를 파는 서초구서초1동 부녀회는 곁에 자리한 전문노점상이 시비를 거는 통에 구청이 지정해준 자리에 물건을 펴놓기도 힘들 정도. 방배동 부녀회에서 나온 한 주부는 "날씨가 좋아져서 그런지 이달 들어 장사꾼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 며 "그동안 쌓아온 알뜰장터의 명성이 퇴색할까 걱정" 이라고 말했다.

이종희 (36.서울 중랑구 신내동) 주부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이곳에 오는데 전문 노점상들이 들끓어 가정주부가 참여하기 어려운 것 같다" 며 대책을 호소했다.

이에 대해 서초구청 가정복지과 왕규봉 (49) 계장은 "전문장사꾼을 일일이 골라낼 수는 없지만 자리다툼을 막기 위해 당일 접수 순으로 자리를 배정해주는 등 빠른 시일 안에 대책을 마련하겠다" 고 밝혔다.

유지상.최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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