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판, 징하요 (4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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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43) 졸속제작 '창'

'창 (娼)' (97년) 은 옛날부터 한번 다뤄보고 싶은 소재였다.

갑작스레 결정해서 후딱 해치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매매춘문제를 다룬 영화로 80년대 작품 '티켓' 이 있었지만, 소재만 같았지 바탕은 달랐다.

'창' 에서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고 싶었다.

우리의 경제가 커지는 것에 반비례해 도덕이랄지 성윤리가 깨지고 있는 데에 대한 사회.경제적 고찰을 해보고 싶었다.

물론 이 작품을 만들게 된 배경에는 영화사 (태흥영화사) 의 어려운 경제사정도 영향을 미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장군의 아들' 시리즈 이후 만든 대여섯편의 영화가 흥행에 실패, 어려움에 빠진 회사의 사정을 목도하고도 나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솔직히 이런 소재의 영화를 하면 그래도 흥행 결과가 허망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계산' 이 없지 않았다.

'창' 은 '수진' 이란 여성이 70년대 후반 홍등가에 들어와 90년대 중반, 퇴물로 전락할 때까지 기구하고 슬픈 삶을 엮은 영화다. 나는 이 주인공 (신은경) 을 통해 인간성과 도덕을 잃어가는 메마른 상실의 시대를 그리고 싶었다.

그 상실의 아픔을 도드라지게 하기 위해 나는 고향을 모티브로 썼다.

고향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늘 고향을 그리워하며 사는 수진. 단골손님인 철공소 직원 역시 고향을 찾는 남자다.

한참 세월이 지난 뒤 둘이 찾아낸 고향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뒤늦게 서로가 서로에게 고향이었음을 알아차린다.

나는 영화를 만들면서 이 대목에 힘을 실었다.

그런대로 미모와 육체미를 갖췄으니 '괜찮은 놈' 만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사는 수진을 통해 '등잔 밑이 어둡다' 는 진리를 복원해 내고 싶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의 소중함이랄까, 그런 것 말이다.

이를 확대해 보면 우리네 인생사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살면서 정말 소중한 것, 그걸 알아차리고 소중한 것처럼 지니고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너나 없이 우리는 그 소중한 걸 모르고 산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어딜 가도 (포주가) 잡질 않는다. " 왜냐하면 포주는 그녀가 반드시 돌아올 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수진에게는 탈출할 용기도 없다.

패자로서 남는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수진의 그 절망이 웅변해주고 있다.

우리네 일상도 결국은 도약과 탈출을 꿈꾸지 못한다는 면에서 그 창녀의 생활과 뭐가 다를 게 있겠는가.

그걸 나는 '창' 에서 은유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주제의식을 '창' 을 통해 잘 다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주연배우 신은경과 몇몇 스태프들과 함께 2개월 정도 서울의 청량리.영등포.미아리와 전국 주요 도시의 변두리 사창가를 돌며 윤락녀들의 생활상을 취재했다.

과정은 이처럼 정성스러웠지만, 결과가 졸속처럼 돼 버렸다.

더러는 "저속하다" 는 지적도 받게 됐다.

이는 초스피디한 제작이 낳은 결과였다.

그런 아쉬움 때문에 지금도 나는 "더 준비해서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 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하고 싶었던 소재였던 만큼 안타까움이 컸던 것이다.

나는 '서편제' '태백산백' '축제' 등 전작들을 찍을 때 거의 1년 가까운 촬영기간을 쓰곤 했다.

그런 영화에는 서너 계절의 풍광이 자연스럽게 담겼다.

이에 비해 '창' 은 여름 한철에 다 찍고 말았다.

미리 추석 개봉작으로 극장을 잡아 놓았기 때문에 시간에 쫓긴 탓이다.

"이제 다시 졸속은 없다. " 나는 굳게 다짐했다.

철저한 준비끝에 벽돌쌓기처럼 차근차근 쌓아가는 과정이 좋을 때 결과도 만족할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이다.

'창' 의 개봉이후 거의 2년만에 제작에 들어간 '춘향뎐' 은 그래서 '졸속청산' 의 새로운 시발점이 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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