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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도 끄떡 없는 신흥그룹 기업가들의 성공 키워드

중앙일보

입력

포브스코리아혹독한 불황과 위기에도 지속 성장한 기업은 있게 마련이다. 우리 경제가 큰 시련을 겪은 최근 10여 년 동안에도 믿기지 않는 성공을 거둔 신흥 기업가가 여럿 눈에 띈다.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 강덕수 STX그룹 회장, 이해진 NHN 이사회 의장,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 김정주 NXC 사장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경영철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통해 성공 비결을 분석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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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몇 살이건, 고향이 어디건, 어느 학교를 나왔건, 지난날 무슨 일을 했건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능력이 있는데 아무도 안 알아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소개서를 써 보내시오.’
출판계의 전설로 불리는 <뿌리깊은나무>의 고(故) 한창기 선생이 세계적 명성의 백과사전을 국내 판매하는 한국브리태니커를 설립한 후 1971년 신문에 낸 영업사원 모집 광고문구다. 이 특이한 광고를 보고 지원한 청년 중 한 사람이 바로 윤석금(64) 웅진그룹 회장이다. 윤 회장은 “이 광고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브리태니커에 입사한 그는 자신도 몰랐던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전국 판매인 360명 가운데 1위를 놓치지 않았고, 입사 1년 만에 브리태니커 미국 본사에서 전 세계 54개국 세일즈맨 중 최고 실적자에게 주는 벤튼상도 받았다. 그가 세일즈의 귀재가 된 비결은 예상 외로 아주 간단하다.
“어느 빌딩에 책을 팔러 가든지 그 회사 직원들이 다니는 정문으로 들어갔다. 다른 세일즈맨들은 방문객이 다니는 문으로 들어가다 출입을 차단 당하기 일쑤였다.”
세일즈가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책을 팔러 갔다가 60세 정도의 어느 사장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고 ‘내가 60세가 되었을 때는 당신보다 훨씬 부자가 돼 있을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그는 60세가 되기도 전에 한국 100대 부자에 올랐다.
윤 회장은 세일즈를 통해 얻은 자신감으로 1980년 웅진씽크빅(옛 웅진출판)을 설립했다. 당시 자본금 7000만 원의 조그만 출판사는 30년도 안 돼 자산 기준 재계 33위 그룹으로 성장했다.

14개 계열사를 거느린 웅진그룹은 지난해 매출 4조6000억 원을 달성하고 올해 매출 5조2000억 원을 바라보고 있다. 윤 회장은 2010년 매출 12조 원 달성을 목표로 잡았다.

위기 돌파에서도 귀재다. IMF 외환위기 때 소비자들이 고가의 정수기 구입을 꺼려 재고가 쌓여가는 상황에서 윤 회장은 업계 최초로 ‘렌털 시스템’을 도입해 소비자의 비용 부담을 해소했다. 소비자에게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어 매년 회원이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위기 때 국내 최초로 곡물음료 시장을 개척해 대성공을 거뒀다.

‘아침햇살’은 당시 국내 음료 사상 최단 기간인 10개월 만에 1억 병 판매를 돌파하기도 했다. 윤 회장이 요즘 주목하는 것은 환경이다. 특히 태양광 사업을 중심으로 수처리 사업 등 신성장동력을 본격 가동하며 글로벌 환경기업으로 도약할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웅진에너지는 전 세계에서 가장 효율이 높은 태양광 셀과 모듈을 생산하는 업체인 미국 선파워와 제휴해 설립됐다.

현재 국내 최대 규모인 연간 320MW의 잉곳(실리콘 덩어리)을 생산하며 세계적인 태양전지 원료 생산기지로 자리매김했다. 웅진폴리실리콘은 태양광 산업의 1차 소재인 폴리실리콘 생산에도 뛰어들었다. 경북 상주에 공장을 설립하고 있다. 이로써 태양광 사업의 수직 계열화를 완성하게 됐다.

지속적인 투자로 2~3년 후 태양광 분야에서 1조 원 이상의 매출을 기대하는 윤 회장은 영국 선데이 타임스가 선정한 ‘전 세계 친환경 부자 100인’에서 69위(국내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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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1700만 명이 방문하는 국내 1위 사이트인 네이버(naver)는 ‘항해사(navigator)’에서 브랜드 명을 따 왔다. 2700명에 달하는 NHN 직원이 올 상반기에 받은 1인 평균 보수는 3228만 원으로 월 평균 538만 원이나 된다.

이런 성과는 일등항해사 이해진(42) NHN 이사회 의장이 ‘정보의 바다’에서 처음부터 방향을 잘 잡은 결과다. 이 의장은 평범한 직장인이었지만 남다른 도전을 했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 삼성SDS 연구소에 입사한 그는 초년 때부터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의 25%는 자기계발에 쓰라는 ‘25% 룰’을 철저히 지켰다. 하루 8시간 중 두 시간을 자기계발에 투입했다. 남들이 8시간에 하는 업무를 6시간에 소화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잔업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두 시간의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3년간 몰두해 찾아낸 아이템이 ‘검색엔진’이었다. 회사를 설득하고 기술을 수집하고 세 명의 신입사원과 팀을 꾸려 97년 사내 벤처 1호 네이버를 탄생시켰다. 소사장으로 경영하다 99년 분사한 ‘네이버컴’을 설립한 그는 이후 한게임을 합병하면서 지금의 NHN으로 키웠다.

이 의장은 인터넷에 룰이 있음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강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것이었다. 검색이 인터넷시장의 트렌드가 될 것을 짚었기에 네이버는 다음(Daum)과 서너 배 이상 격차를 내며 1위로 치고 나갈 수 있었다. 이후 네이버의 서비스는 사실상 업계 표준이 됐다.

지식검색 서비스를 처음 시작할 때 질문에 대한 답이 얼마나 될까 우려했지만 질문보다 답이 더 많았다. 네이버는 현재 수백만 권의 논문 서비스도 유료로 진행 중이다. 한게임을 유료화한다고 했을 때도 다들 비웃었다. 그러나 한게임의 매출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전 세계 닷컴이 모두 적자를 내는 상황에서 200억 원 흑자를 냈다. 이 의장은 2004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NHN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모든 신규 서비스는 그의 승인이 있어야 세상에 나올 수 있다. 그는 서비스 이름만 듣고도 성패 여부를 판단한다.

올 초 개편한 네이버 메인의 오픈 캐스트와 뉴스캐스트, 애드캐스트도 모두 기본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특히 오픈캐스트는 이 의장의 철학이 담겨 있다. 메인 화면을 개방하고 사용자에 편집권을 주자는 취지를 살린 서비스다. 모바일과 웹의 접점을 마련한 캘린더, N드라이브 같은 개인화 웹 서비스(PWE)도 그가 오래전부터 청사진을 그린 것이다.

네이버가 최근 일본 검색시장에 선보인 ‘마토메’도 이 의장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다. NHN은 올 2분기엔 매출 3026억 원, 순익 1032억 원을 기록했다. 매년 50∼60%씩 빠르게 성장한 것에 비하면 성장률이 다소 둔화되고 있지만, 이 의장은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고 있다. NHN은 현금 보유액이 2800억 원일 정도로 투자 여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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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STX그룹의 수주 규모는 38조 원, 매출은 30조 원에 달할 전망이다. 출범 8년 만에 자산 규모가 67배, 매출은 96배, 수주 규모는 162배 성장한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났다.

STX 급성장의 중심에는 강덕수(59) 회장이 있다. STX그룹을 창업 8년 만에 재계 12위에 올려놓았다. 강 회장은 올 초 세계 최대 크루즈선 건조사 아커야즈(지금의 STX유럽)의 지분을 모두 인수하며 유럽은 물론 세계 조선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4월엔 중국 다롄 생산기지에서 첫 번째 선박을 성공적으로 인도하며 한국 조선산업의 지평을 전 세계로 넓혔다. 이를 통해 유럽·한국·중국을 잇는 조선기계 부문 글로벌 3대 생산거점을 성공적으로 구축했다. STX조선해양은 수주 선박 수로 세계 2위 조선사로 급부상했고, 국내 ‘만년 3위’였던 STX팬오션(옛 범양상선)은 1위로 등극했다.

강 회장은 1973년 쌍용양회에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초년 때부터 기획력이 뛰어난 데다 한번 일을 맡으면 속전속결하는 추진력이 돋보였다. 이후 경영관리·기획·금융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93년 쌍용중공업의 CFO(최고재무책임자)에 올랐다. 2000년 외환위기로 경영난을 겪던 쌍용그룹은 회생을 위해 쌍용중공업 지분을 한누리컨소시엄에 매각했다.

한누리컨소시엄은 평소 회사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오너처럼 일하는 강 회장을 사장으로 발탁했다. 그가 그것에 만족했다면 나름 성공한 봉급쟁이가 되긴 했겠지만 샐러리맨 신화는 없었을 것이다. 당시 쌍용중공업 주식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강 회장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청춘을 바친 회사에 대한 애착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미래를 보았다. 순간 ‘오너처럼’ 일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오너가 돼’ 회사를 경영하면 승산이 있다고 확신했다. 상여금으로 받은 스톡옵션을 포함해 20억 원의 사재를 쏟아부었다. 쌍용중공업 주가가 워낙 바닥인 때라 그 정도로도 그는 단번에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당시 갖고 있던 아파트 세 채를 팔거나 담보로 대출받아 운영자금을 조달했다. 물론 그는 가족과 전셋집으로 옮겨야 했다. 그의 나이 50이었다. 은퇴를 준비할 나이에 모든 것을 건 모험을 다들 무모하다고 했다. STX그룹이 숨가쁘게 달려온 성장과정을 보면 강 회장의 속도경영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다른 기업들이 30년, 50년 걸려 한 확장을 10년도 안 돼 다 해치울 태세로 속도를 냈다. 강 회장은 바쁜 일정에도 매년 상·하반기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는 대졸 신입사원 공채 면접에 직접 참석하고 있다. 재계 12위 그룹의 총수가 신입사원 면접을 직접 주관하는 것만으로도 인재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올해 채용 규모를 줄이자는 실무자들의 의견이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더 많이 뽑으라고 주문했다. 강 회장은 직원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야 회사가 잘된다는 신념을 실천했다. 인수 후 구조조정을 하더라도 인력 감축은 없었다. STX그룹은 출범 이후 8년 연속 전 계열사가 무분규로 단체협상을 타결했다.

M&A를 할 때 강 회장이 가장 주목하는 것은 기존 사업과의 시너지 효과다. 일단 M&A를 결심하면 과감하게 베팅한다. 대동조선을 인수할 때 인수 작업을 맡았던 실무진이 “회사 재무 여력 등을 따져볼 때 인수가격은 400억~600억 원 정도가 적당할 것 같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강 회장은 “남이 얼마를 쓰든 우리에게 대동조선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따져야 한다”며 1000억 원을 써냈다. 그의 쾌속항진은 계속된다. 해외 플랜트 건설과 에너지 개발 등 미래 신성장동력도 확충하며 2012년에는 매출 50조 원에 도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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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진(42) 엔씨소프트 사장이 서울대 전자공학과 재학 중 현대정보기술에 입사해 한메소프트를 창업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래아한글’의 개발자로 업계 종사자 사이에서나 주목 받는 정도였다. 1997년 엔씨소프트를 창업해 출시한 온라인 게임 ‘리니지’는 그를 업계뿐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유명하게 만들었다.

리니지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폭발적 인기를 끌자 투자자가 몰려들었고, 엔씨소프트의 기업가치는 CJ와 한진해운 등 전통적인 대기업을 단숨에 넘어섰다. 세계도 그를 주목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2002년에 그를 ‘아시아 차세대 리더 18인’ 중 한 명으로 뽑았고 <비즈니스위크>도 그를 ‘아시아 스타’(2001년)와 ‘세계 e비즈에 영향력 있는 25인’(2002년) 중 한 명으로 꼽았다.

그의 성공신화가 이어지는 동안 엔씨소프트는 매출과 순익이 한 해 평균 50%씩 성장했다. 현재 해외의 매출 비중이 더 높다. 기자가 4년 전 만났을 때 그는 “리니지 1?의 사용자 수가 현재 얼마가 되든지 간에 세계 전체 게임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미미하다”고 말했다.

그는 “빅뱅이 발생할 것을 직감하고 있을 뿐 ‘How to get there(어떻게 그것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해 안타깝다”고 했다. 당시 그는 리니지 시리즈를 일본 게임 ‘파이널 판타지’처럼 10탄까지 만든다는 각오를 보였다. 게임 대중화 시대에는 누구든지 함께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이 통한다는 생각에서 ‘영화 같은 게임’도 개발하겠다고 했다.

이런 게임이 만들어진다면 그의 야심대로 회사 이름(NC·Next Cinema)이 실현되는 것이다. 엔씨소프트는 게임 회사가 아니라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였다. 현대전자 연구소의 엔지니어 열 명이 독립해 그룹웨어와 홈페이지를 제작하는 정도였다. 김 사장은 창업 때부터 남달랐다.

소프트웨어를 해외에 수출하는 꿈을 꾸었고, 남들이 인터넷을 정보망으로 볼 때 그는 ‘엔터테인먼트망’으로 보았다. 창의력, 엔터테인먼트망, 수출 이 세 가지를 종합해 내린 결론이 게임을 개발해 수출하는 것이었다. 김 사장은 올해 매출 목표를 기존 5000억 원에서 5860억 원으로 상향조정했다.

영업이익도 1000억 원에서 1800억 원으로 늘려 잡았다. 엔씨소프트는 2분기 연결 기준 매출 1378억 원과 순익 338억 원을 달성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각각 70%, 451%나 증가한 수치다. 중국 등 해외에서 거둬들인 ‘아이온’의 로열티가 크게 기여했다.

아이온으로만 406억 원의 매출을 올렸고, 리니지와 리니지2도 각각 275억 원, 374억 원의 매출을 거뒀다. 9월 북미와 유럽 정식 서비스를 시작하면 3분기부터 아이온의 해외 매출이 본격화할 것이다. 이미 엔씨소프트는 글로벌 메이저로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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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브스코리아가 2005년 국내 벤처 부자를 조사했을 때 1위를 차지한 인물이 바로 김정주(41) 넥슨(NXC) 사장이었다. 당시 김 사장의 보유주식 평가액은 3505억 원이었다. 물론 지금은 더 큰 부자가 됐다.

포브스코리아는 올 초 ‘한국 100대 부자’에서 그를 36위(3억2000만 달러)에 올렸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출신인 김 사장은 1993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산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중에 지도교수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

“자네는 일찌감치 사업을 하는 게 낫겠네.” 칭찬인지 꾸중인지 모르지만, 그것이 창업을 결심한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대학 시절 안산공단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기억을 떠올린 그는 ‘화학공장보다는 소프트웨어 회사를 차리는 것이 낫다’는 단순 명쾌한 생각으로 94년 넥슨을 창업했다.

창업 후 그는 히트 게임을 쏟아냈다. 그의 성공비결은 남보다 앞서나간 데서 찾을 수 있다. 창업 직후인 95년 출시한 ‘바람의 나라’는 국내 첫 그래픽 온라인게임으로 그야말로 대한민국에 거대한 바람을 일으켰다. 2004년 선보인 국산 국민 게임 1호 ‘카트라이더’ 역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 온라인 게임의 철옹성 ‘스타크래프트’를 제치고 국내 접속 1위에 오르며 게임강국의 자존심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해마다 20%대 성장률을 기록하며 지난해에는 업계 1위를 달리던 엔씨소프트를 가뿐히 제쳤다. 매출의 30%가 이익이다. 하지만 이것은 국내 얘기다. NXC는 이미 글로벌 게임 기업으로 성장했다.

연결 매출로는 지난해 4508억 원 매출에 1439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김 사장이 외환위기와 벤처 거품이 꺼질 때도 성장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게임의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싸고, 쉽고, 재미있는’ 게임을 개발한 것이다. NXC는 투자에도 성공했다. 국내 최대 포털 네이버를 운영하는 NHN의 지분 4.7%를 가지고 있다.

NHN 지분 시장가치는 4300억 원에 달한다. 이외에도 동영상 인기 포털 곰TV를 운영하는 그래텍 지분을 포함해 여러 유망한 IT 기업의 주주다. 늘 “한국 땅이 좁다”고 외쳐온 김 사장은 일선 경영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긴 후 해외 곳곳을 돌며 확장을 고민해 왔다. 2006년 지주회사 넥슨홀딩스를 설립해 올해 본사를 제주도로 이전한 후 그는 수평선 너머 더 넓은 시장을 보았다.

‘카트라이더’를 일본 국민 게임으로 만드는 야심 찬 목표를 세우고 일본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일본 디즈니랜드를 세운 월트디즈니와 일본 간판 게임업체인 닌텐도와 손잡고 진입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닌텐도 역시 넥슨의 캐주얼 게임을 닌텐도DS에 담고 싶어 하는 눈치다.

국내 기업공개를 서두르지 않던 김 사장은 일본에서 상장을 검토하고 있다. 김 사장은 올해 일본 시장에서 100억 엔 이상의 매출을 올릴 생각이다. 이를 포함해 국내외 연결 매출 5000억 원 돌파에 도전하고 있다.

글 이임광 칼럼니스트·사진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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