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작 쟁점 읽기] 앨빈 커넌 교수의 '문학의 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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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미국 프린스턴대 명예교수 앨빈 커넌 (76) 의 '문학의 죽음' (최인자 옮김.문학동네.1만2천원) 이 번역.출간됐다.

굳이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최근의 문학위기는 복합적이다.

문학이 낭만주의.모더니즘 등 형이상학과 권위라는 낡은 가치관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와중에 영상.인터넷 문명이 가져온 반작용에 부닥친 것이다.

커넌은 이를 '문학적 신념의 위기' 라고 부른다.

비평작업도 문학을 죽음으로 몰고 있는 한 요인. 한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70년대 = 사회과학의 시대' '80년대=문학의 시대' '90년대 = 대중문화의 시대' 라는 등식을 만들어놓고 있다.

문학은 정말 '전지구적 절멸' 의 순간에 서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문학평론가 남진우 (39).한기 (40) 씨가 그 쟁점을 들춰낸다.

◇남진우(문학평론가) "TV.컴퓨터에 밀려 상아탑에서만 연명"

최근 우리 문학계엔 유령 하나가 떠돌고 있다.

그 유령의 이름은 '문학의 죽음' 이다.

처음엔 바다를 건너온 풍문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던 이미지의 존재는 시간이 갈수록 점차 구체적인 형상을 갖춰나가고 있으며 작금에 이르러선 강박적일 만큼 그 출현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 평단의 중진 앨빈 커넌의 '문학의 죽음' 이 의미심장하게 여겨지는 것은 이 저작이 풍문의 원산지에서 보내온 최신 보고서일 뿐만 아니라 그 유령의 정체를 비교적 적실성 있게 그려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문학의 죽음' 이란 개념을 단순히 수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돌이킬 수 없이 진행중인 현실의 단면으로 본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저자에 따르면 문학의 사인은 자살이기도 하고 타살이기도 하다.

먼저 타살이란 관점. 문학의 죽음을 초래한 일차적 요인은 정치적 사회적 기술적 변화, 특히 테크놀로지의 변화에 주어진다.

영화나 텔레비젼 컴퓨터 같은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인쇄된 서적에 기반한 문학을 빈사 상태로 몰아넣었으며 언어에 대한 믿음을 극도로 약화시켰다.

그 결과 문학은 대중과의 연결 고리를 잃고 상아탑이란 좁은 공간에서만 연명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문제는 문학인들이 이러한 외적 충격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는 커녕 스스로를 자해하는 우매한 대응 전략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아카데미 안에서 과잉생산된 문학이론과 실제비평은 문학에 대한 낡은 관념의 해체를 넘어 문학 그 자체의 수명을 앞당기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해체주의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방법론이 대학 사회를 휩쓰는 동안 비평계의 홍위병들은 '지적 마오이즘' 으로 문학사의 무덤을 장식했다.

하지만 여기서 유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설사 문학이 죽었다고 해도 문학행위는 계속된다는 점이다.

문학은 사라져도 문학 산업은 당분간 살아서 오히려 더 번창할 수 있다.

이 아이러니 속에 오늘날 문학의 운명이 있다.

문학은 죽었지만 그 시신은 강시가 되어 우리 눈앞을 돌아다닌다.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문학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시켜 거기서 남은 이익을 짜내려는 부질없는 노력과 단호히 결별할 때 아마도 문학 이후의 문학이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 한기(문학평론가) "잠시 쇠약해 있을뿐 가장 편한 문화양식"

'문학의 위기' 론은 다만 엄살인가.

여기에 글자 한 자를 보태면, '인문학의 위기' 론이 되고, 그것이 최근 우리 사회 이슈로 부각되고 있음을 보지만, 저 바다 건너로부터 이제는 '문학의 죽음' 론까지가 전파되고 있다.

이 호들갑의 화두 제시를 통해 작가가 노리는 바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테지만, 오늘 문학의 위기, 언어 예술의 위기 현실은 보다 커다란 문명사적 변화 추진력에 의해서 야기되고 있다는 것이 통설이다.

정보사회의 개념을 제출했던 다니엘 벨 같은 사람의 논의는 그 입론의 근거를 마련해 준다.

말하기, 쓰기, 인쇄 문화의 단계를 거쳐서, 바야흐로 텔리커뮤니케이션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 그 진단이다.

테크놀로지.지식.정보의 개념에 기반한 이와같은 문명사적 패러다임의 새구축 시대에 자체 반성의 일환으로 '문학 위기론' 이 제출됨은 그러므로 타당하고 시의 적절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특별히 문학과 인문학 범위에서 발호하고 있는 자기 모순의 급진적 해체 비평의 조류에 대해 저자의 불만과 논점은 집중되고 있는 듯 하지만, 근본 해결책의 제시는 될 수 없다는 데 있다고 하겠다.

낭만주의.모더니즘 시대의 위대한 정전들이 해체로 말미암아 시살되고 있다는 항의를 저자는 제출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정전의 복구, 고전의 재목록화가 우리 시대 문학 부활의 길이라고는 믿지 않는 듯하다.

문학의 죽음이 비평적 자살의 결과만은 아니라는 시사다.

문학의 죽음이 타살의 결과라면, 그 가해자들은 우리 현실 도처에 널려 있다.

그 가장 우스운 현실은 문학의 가장 긴밀한 동맹군, 지원자여야 할 신문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라는 최악의 자승자박적 구호와 함께, 책과 문학을 경시해왔던 최근 우리 언론사의 족적에서 확인된다고 하겠다.

'정보통신학' 이라는 정체불명의 대안 개념보다는, 그러나 전설적인 SF작가 아이작 막시모프나 혹은 우리 '씨ㅇㆍㄹ의 소리' 저자의 신념을 여기에 옮겨 놓음이 더욱 타당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누워서도 즐길 수 있는 가장 편리한 문화 양식이 책이며,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것이 그들의 전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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