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를 열며] 새 천년 지도자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해마다 교인들을 대상으로 몇차례씩 헌혈운동을 벌이지만 아무렇게나 헌혈이 이뤄지는 게 아니다.

우선 젊고 건강한 사람의 피라야 하고 일단 피검사를 통해 문제가 없는 피라야 한다.

요즘 정치마당에 젊은피 수혈론이 거론되고 있다.

정치도 이젠 싱싱한 젊은이들의 참여가 요청된다는 뜻일 것이다.

오랜 세월 정치에 물들고 오염된 그 피만으론 제2건국이 어렵다는 판단에서 젊은피 얘기가 나왔을 것으로 본다.

기독교를 피의 종교라고 한다.

이유는 그리스도의 피가 인간을 구원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죄인의 피는 죄인을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에 죄 없는 그리스도가 피를 흘려 구원했다는 것이 기독교의 구원 교리인 것이다.

낡은 구태 정치가 젊은피를 수혈함으로써 젊어지고 새로워질 수만 있다면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피가 젊고 건강해야 한다는 점이다.

건강한 피란 피의 순수성을 의미한다.

젊은피 속에 이미 불순한 잡균들이 섞여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건강한 피를 가진 젊은이들이 정치뿐만이 아닌 경제.문화.예술.교육.사회 각 분야에 대거 참여해 명실상부한 새나라 건설에 기여할 수 있기를 열망한다.

그러나 썩고 병든 피를 가진 젊은이라면 나서도 안되고 기용해도 안된다.

그 피는 수혈받는 사회와 역사를 병들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할 일은 피검사라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검증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성큼 다가서고 있는 새 천년은 새로운 상 (像) 의 지도자를 요청한다.

어떤 지도자가 바람직한 지도자일까. 첫째, 비전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헨리 키신저는 "지도자의 과제는 민중을 있던 곳으로부터 있어보지 못했던 곳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지도자는 커다란 비전의 연금술을 구사해야 한다" 고 했다.

비전이 없으면 편견과 아집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비전이 없는 지도자는 민중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정신적 장애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민중으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고 내일을 바라보게 하고, 그리고 새로운 천년의 그림을 그리게 하는 사람이 우리네 지도자가 돼야 한다.

둘째, 책임지는 사람이어야 한다.

말과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한다.

거짓말에 익숙한 사람, 그래서 온갖 기교를 동원해 민초들을 속이고 기만하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건 지도자로서 부적합하다.

책임이란 그 사람의 정직성과 직결된다.

부정직한 사람은 책임성이 없게 마련이고, 자기 언행을 책임지는 사람은 인격이 바르고 곧게 마련이다.

스펄전의 말이 생각난다.

"황언자들 틈새에 사는 것보다는 이리떼 속에 머무르는 것이 낫다. "

셋째, 자기관리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修身齊家治國平天下) 라는 고어를 들지 않더라도 자신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지도자가 되기 어렵다.

지도자는 지도자로서의 품위가 있다.

자신의 인격과 삶을 바로 관리하지 못해 세인의 구설수에 오르내린다든지 지탄받을 일을 저지른다면 그는 지도자일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시대는 너무나 뻔뻔한 사람들이 많다.

국가경제를 이 모양으로 만든 사람들, 외화를 빼돌리다 덜미 잡힌 사람들, 이런 일 저런 일로 세상을 놀라게 한 사람들이 백주대로를 활보하는 것을 보면 속마음이 쓰리다.

넷째, 위기관리 능력이 있어야 한다.

지도자는 소속공동체의 발전과 위기를 함께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다.

받은 밥상을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쏟아지는 밥상을 추슬러 다시 차리는 것은 더 중요하다.

국가공동체란 수시로 다양한 위기의 도전 앞에 서게 마련이다.

그때마다 지도자는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해 그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

93년 1월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사설에서 "당신은 지금 당신의 나라 대통령.총리의 리더십에 만족하는가" 라고 묻고, "만일 당신이 만족하고 있다면 당신은 아마 소수 집단에 속할 것" 이라고 했다.

지금 세계는 리더십의 절대권위를 부정하는 추세로 흐르고 있다.

위기관리 능력이 없는 지도자는 자신과 자신이 이끌어나가야 할 공동체를 불행의 늪에 빠뜨리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유럽 공동시장의 초기 입안자였고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 사무총장이었던 헨리 스파크가 남긴 말. "우리는 더이상의 위원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미있는 것들만으로도 충분하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사람을 다스리고 이끌어갈 수 있는 지도자다. "

그렇다.

우리의 급선무는 제도나 기구가 아니다.

그것을 바로세우고 이끌어갈 사람들,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박종순 충신교회 담임목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