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규제개혁 아직 멀었다' 기획에 부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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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규제의 현장에선 '쉬쉬' 하는 은밀한 소리가 들린다. 규제를 걸고 피해가는 당사자들이 대가를 주고받으며 내는 소리다.

그러나 아무리 쉬쉬해도 그 수많은 규제의 현장이 다 덮이진 못한다. 중앙일보가 지난 1주일 동안 헤집어 낸 사례들이 그렇다.

그렇다고 정부가 아무리 현장 점검에 나선들 헌 족쇄 풀고 새 족쇄 채우는식의 규제완화 아닌 변화를 일일이 따라잡을 재간은 없다. 한국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고 현정권만 아니라 역대 정권도 다 그랬다.

어차피 질 규제와의 전쟁이니 일찌감치 만세 부르자는 소리가 아니다. 규제라는 악질과 싸워 물고를 내려면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소리다.

규제완화의 의지를 다시 한번 벼리고 현장의 '쥐' 들을 열심히 쫓아다닌다고 규제는 잡히지 않는다. 쥐잡기 전쟁터에서 벗어나 규제의 '구중궁궐 (九重宮闕)' 로 바로 들어가야만 규제는 비로소 잡히기 시작한다.

규제의 구중궁궐은 규제의 모태 (母胎) 다. 거기엔 잘 분산되지 않고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있다. 법에 의한 지배보다 자의적 (恣意的) 권력의 '이래라 저래라' 가 더 세다. 그 '거울 이미지 (mirror image)' 가 현장의 쥐들이다.

쥐들이 곳간의 쌀가마를 갉는 것은 그래도 잘 눈에 띈다. 그러나 곳간에 쌀 채우는 일이 처음부터 비틀리는 시장의 왜곡은 잘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 피해는 훨씬 크고 대 (代) 를 이어 물려지는데도 - . 구중궁궐이 바뀌려면 우선 백성부터 국민으로 바뀌어야 한다.

백성들은 무슨 일만 나면 조정을 바라보지만 국민들은 정부에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바라지 말아야 하는지를 안다. 정부 역할의 한계에 대해 국민들부터가 분명한 선을 긋지 않으면 정부 개입은 크고 작은 규제가 돼 국민들을 옥죈다.

땅값이 무섭게 뛰는데 정부는 무얼 하느냐는 아우성이 토지초과이득세로 돌아와 좁은 나라의 효율적 땅 이용을 크게 망가뜨리는 등 부작용을 있는 대로 일으킨 끝에 위헌 (違憲) 판결로 죽어버린 일을 벌써들 잊었는가. 주변의 거미줄 같은 규제가 혹시 우리가 요구한 것들은 아니었는가.

규제를 잡고 놓지 않는 가장 큰 힘은 기득권이다. 정치권에 로비해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익단체들도 큰 문제지만 가장 큰 기득권은 역시 권력.관료의 기득권이다.

현직 대통령이 과연 기득권을 버릴 수 있을까. 특히 공천을 통한 의회에 대한 기득권, 사정 (司正) 관련 기득권,징세 (徵稅) 행정에 대한 기득권, 이 세가지를 버릴 대통령이 과연 나올까.

'다음 대통령' 을 바라보고도 총풍 (銃風).세풍 (稅風) 사건이 벌어지는 이 나라에서. 희망은 있다. 다음에 대통령이 되고 싶은 사람은 이 세가지 기득권을 포기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어야만 하도록 시민단체들이 나서는 것이다.

관료 집단의 철밥통을 어느 정도나마 깰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고시 (考試) 를 없애는 것이다. 무턱대고 없애자거나 이미 고시에 합격한 사람들의 신분마저 박탈하자는 것이 아니다. 서로 봐주기가 아닌 투명하고 합당한 공무원 채용 시스템으로 고시를 대체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각 분야의 인재들이 공개된 경력과 실적, 의회 청문회 등의 검증을 거쳐 정부에 들어가 봉사하면서 명예를 얻고 다시 민간으로 돌아가 돈을 버는 미국식 회전문 (revolving door) 시스템은 눈여겨 볼 만하다.

다른 개혁도 마찬가지지만 규제개혁도 김병주 (金秉柱) 서강대 교수가 늘 말하는 '통시적 (通時的) 분업 (分業)' 을 염두에 둬야 한다.

한 정권이 당대 (當代)에 무슨 일을 다 하려들지 말라는 것이다. 대신 "그래, 내 튼튼한 벽돌 하나 쌓고 갈테니 다음 세대들은 우리 어깨를 딛고 올라서라" 는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 기업, 아니 한 부서의 마인드.문화.행동양식을 바꾸는 데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물며 나라의 일이야. 시장경제의 아버지로 불리는 밀턴 프리드먼 교수는 62년에 이렇게 썼다.

"자유에 대한 위협을 피하면서 정부로부터 편익을 얻는 방법은 무엇일까. 두가지 보편적 원칙이 답을 준다. 첫째는 정부의 활동범위는 제한돼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의 역할은 법.질서를 유지하는 일, 사 (私) 계약을 이행시키는 일, 경쟁적 시장을 육성하는 일이어야 한다. 둘째는 정부의 권력은 분산돼야 한다는 것이다. "

김수길 경제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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