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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개혁 아직 멀었다] 법령.규정은 '공무원 떡값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지난해 5월 서울 서소문동에 문을 연 국밥집 ㅅ옥. 개업날 동사무소 직원이 찾아왔다.

문 앞에 설치한 바퀴 달린 입간판이 불법광고물이라며 '라면값' 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3만원을 쥐어줬다.

여름휴가철에도 그는 5만원을 받아갔다.

대신 단속이 있을 때는 미리 통보해준다.

식당 앞에 세워놓는 입간판은 옥외광고물 관리법상 불법간판이다.

서울시의 경우 구청이 단속권을 위임받아 수시 점검한다.

하지만 거의 모든 식당이 입간판을 그냥 둔다.

관계규정은 일선 공무원 음성수입의 '법적 근거' 구실을 할 따름이다.

'음식물 쓰레기 처리시설 구입시 기종은 반드시 사전승인을 받기 바람' '어린이 놀이터에 케이블 TV를 설치하고, 증빙자료를 제출할 것' '머릿돌을 설치하되 우리 시와 사전 협의할 것' - . 아파트.연립주택 등을 지을 때 감초처럼 따라붙는 '승인조건' 들이다.

내용도 대부분 시시콜콜해 당국이 이런 일에 관여할 만큼 한가로운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주택공제조합이 94~98년 사이의 서울시내 주택사업계획승인서 2천4백62건 중 1백건을 무작위 추출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러한 조건들이 승인서마다 평균 3건씩 붙어 있다.

공무원의 과다한 재량권 행사가 국민에게 부담을 지우고 있는 것이다.

규제완화 드라이브가 과연 국민의 생활편의로 이어졌을까. 규제가 많이 사라지고 민원처리도 크게 빨라진 게 사실이다.

시청이나 구청을 찾으면 변화가 뚜렷이 보인다.

하지만 아직도 국민을 옥죄는 유.무형의 규제는 많다.

불투명한 기준과 공무원의 과다한 재량권이 '저질규제' 를 낳고 이것이 부패로 연결되는 악순환을 낳기도 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 2월 서울.인천.부산의 96개 단란주점 업주들을 면접조사한 결과 허가과정에서 70%, 영업과정에서는 74%의 업주가 경찰.구청 공무원에게 금품을 준 것으로 드러났다.

단속시 처벌완화를 바라고 상납한 업소가 전체 상납업소 (66개소) 의 62.1%였다.

이익집단들의 각종 프리미엄도 국민으로 하여금 규제현실을 절감케 한다.

전북 익산시의 주부 金모 (48) 씨. 지난 2월 자동차매매사업조합에 가입하지 않고도 중고자동차 매매가 가능해졌다는 소식에 사업자등록하러 시청을 찾았다가 분통을 터뜨렸다.

조합 의무가입 조항은 없어졌지만 자동차 매매 과정에서 쓰는 계약서는 반드시 조합원용 서식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 조합에 문의하니 ^매매계약서는 조합원에게만 팔고^조합가입비는 1천만원이며^탈퇴해도 돌려주지 않는다는 어이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자동차 매매업자가 차량을 매매하거나 이를 알선할 경우 별지 16호 서식을 사용해야 한다' 는 법규가 문제였다.

'별지 16호 서식' 이 바로 건설교통부장관의 위임으로 자동차매매조합이 독점 제작.검인하는 계약서라는 것. 눈을 씻고 찾아봐도 법령에는 독점위임의 근거가 없었고, 도대체 누가 이런 지시를 내리는지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업승인서상에 '조건을 이행하지 않으면 공사를 중지시킬 수 있다' 는 문구가 있기 때문에 공무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홍익대 김종석 교수 (경영학) 는 "현실에 맞도록 규제를 고쳐 준수율을 높이고, 시민이 피해 보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고 말했다.

기획취재팀 = 박의준.하지윤.왕희수.박장희.나현철.고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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