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암 공개한 英 바실 흄 추기경에 국민들 감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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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최근 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난 두가지 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합니다. 하나는 여생을 준비할 시간이 아직도 조금은 남아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마음이 너무나도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

영국 가톨릭계의 '큰 어른' 바실 흄 (76) 추기경이 지난 16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띄운 내용이다.

잉글랜드.웨일스 지역 사제들을 위해 쓴 이 글은 영국 가톨릭계는 물론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뭉클한 감동을 안겨줬다.

그는 이 글에서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공개하고 최후의 순간까지 꿋꿋하게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가톨릭 신도들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의 쾌유를 비는 기도모임을 속속 개최하고 있다.

흄 추기경은 18일엔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열린 고 (故) 패트릭 캐세이 대주교 추모미사에 참석했다.

투병으로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쓰러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에 쓸모있는 존재로 남고 싶다" 며 인생의 끝자락을 신도들과 보내고 픈 심정을 말해 주위를 숙연케 했다.

그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둔 이 때 코소보인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 며 "밀레니엄을 당당하게 맞기 위해서는 인류가 도덕적 기준을 바로세우는 것이 절실하다" 고 호소하기도 했다.

흄 추기경의 한평생은 봉사와 헌신으로 넘친다.

그는 고통에 빠진 이웃들에 대해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

북아일랜드공화군 (IRA) 소속 테러리스트라는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던 아일랜드 청년 4명의 구명운동에 앞장서 89년 석방을 이끌어냈다.

그는 동성애.낙태 등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하는 입장을 지켜왔다.

"성 (性) 은 신의 선물인 만큼 경외감을 갖고 대해야 한다" 며 사회에 만연한 성적 타락을 질타해 왔다.

다이애나 비 (妃) 와는 생전에 자선행사에 함께 참석할 정도로 가까웠지만 97년 그녀의 사망을 애도하는 미사를 집전하는 자리에서 "그녀는 결코 성녀가 아니다" 고 주장, 비이성적인 추모열기를 경계하기도 했다.

흄 추기경은 1945년 베네딕틴 신학교에 입학, 사제의 길로 들어섰으며 76년 웨스트민스터 대주교가 되었고, 2개월 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그는 요즘 "병 때문에 나의 활동이 제한받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나에게는 어떤 혼란도 없다.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겼다" 고 말한다.

그러면서 항상 밝은 표정을 잃지 않는다.

"교황이 '대희년 (大禧年)' 으로 선포한 오는 2000년을 맞을 수 있다는 게 어린아이처럼 즐겁다" 고 말하고 있다.

영국 성공회의 조지 캐리 캔터베리 대주교는 "추기경의 병환소식에 비탄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인물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미래를 기다리고 준비한다는 사실에 우리는 더없는 용기를 얻게 된다" 고 말했다.

하재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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