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이홍구 칼럼

민족공동체통일로 향한 ‘기회의 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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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시작된 북한의 ‘협박 외교’ 공세가 연일 그 강도를 높여가며 한반도 문제를 국제정치의 우선 과제로 부상시켰다. 이처럼 강수(强手)를 연발하는 북한의 속사정은 알 수 없으나 지구촌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화약고로 지칭(指稱)되고 있는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마냥 소극적인 자세로 좌시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북한핵 문제’로만 인식되기 쉬운 한반도 문제는 분단과 대결의 당사자인 남북한과 이를 둘러싼 강대국 간의 역학관계가 뒤얽힌 역사적 숙제로 우리 민족의 운명이 좌우되는 것인데 어찌 우리가 이의 해결 과정을 방청객으로 뒷자리에 앉아 수수방관할 수 있을까.

9월 11일은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대한민국의 통일 방안으로 확정된 지 2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20년 전 그날을 회고할 때 냉전종식과 민주화의 흥분과 열기는 대단했으며 그 가운데에서 여야는 물론 국민의 합의 도출을 위한 계속된 토론과 협의를 거쳐 통일 방안이 만들어졌다. 우리의 정치력이 매우 자랑스러웠던 시기였다. 그러나 지난 20년에 걸친 우리의 통일 노력을 회고할 때 남북관계는 우여곡절과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 속에서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었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 씁쓸한 오늘의 현실이다. 더욱이 아무 예고 없이 일어난 이번 임진강 참사는 실망을 넘어 분노와 좌절마저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토록 답답한 오늘의 한반도 상황이 어쩌면 20년 전과 비슷한 국제정치의 전환기가 수반하는 문제 해결의 ‘기회의 창’을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 ‘기회의 창’을 적극 활용하는 의지와 지혜가 오늘의 우리에게 부과된 시대적 사명이라 하겠다.

20년 전,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상징한 동서냉전의 종말이란 대전환기를 오늘의 국제정세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 전 세계를 휩쓴 국제금융위기 등의 여파는 미국의 유일 초강대국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다극 체제가 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와 같은 변화 속에서 미·중·러 3국은 핵무기 보유국 대열에 한사코 참여하려는 북한을 용인할 수 없다는 데에 완전히 합의하고, 더불어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억제하기 위하여 미국·중국·러시아·독일·프랑스·영국 6개국이 공동으로 제재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의 비핵화는 절대로 유지돼야 한다는 원칙은 최근 미·중 전략적 대화에서도 재확인된 바 있다. 이러한 국제적 힘의 흐름에 정면으로 역행할 만큼 북한은 무모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북한을 핵 폐기의 길로 이끌 것인가. 무작정 국제사회의 대북 압력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북한의 핵 보유국 지위를 용납할 수 없다고 미국을 비롯한 관계국들이 강력한 입장을 취하고는 있지만 북한의 의지를 꺾을 만큼 단호한 행동으로 진입하는 데는 신중을 견지하며 설득과 대화에 길을 남겨놓고 있다. 한편, 신뢰와 불신이 함께 작동하는 국제관계에서는 전략적 동반자들 사이에서도 빈틈이 보일 수 있으며 북한은 이를 활용하여 핵 보유와 관계 개선, 즉 양손의 떡을 동시에 성취하려 노력할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의 상황에서는 한국의 적극적이며 창조적인 정책발상과 외교동력이 필요한 것이다.

한편으론 국민적 합의를 이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등 관계국들과의 확고한 공동보조를 굳혀가며 북한을 문제 해결로 유도하기 위해서는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명시한 기본원칙, 즉 하나의 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해 두 정치체제의 공존을 상호 수용하고 교류협력한다는 원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이 원칙의 구현을 위해서는 북한이 한국에서의 미군철수를 겨냥하고 세웠던 그간의 통일전략을 과감히 포기하는 결단이 선행돼야 하며 그것은 곧 북한체제의 안전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6자회담 당사국 모두에게 두루 이해시켜야 한다.

통일로 향한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정책 및 전략개발과 집행은 두 개의 궤도로 나누어 진행될 수 있다. 남북한이 20년 전 가동시켰던 기본합의서 체제를 새로이 발전시키는 궤도와, 북한의 급변사태 및 뜻밖에 찾아올 수 있는 통일의 기회에 대한 대응책을 철저히 준비하는 궤도로 분리해 추진하는 것이다. 전자는 공개적인 토론과 실험을 통해, 후자는 조용히 그리고 차근히 진전시켜 나가는 것이 효율적이라 하겠다. 다만 어느 쪽으로 가든지 우리 국민이 부담해야 하는 공동체건설과 통일의 대가나 희생이 얼마나 될 것인지, 그리고 이에 대한 우리 국민의 각오가 되어 있는지는 민족공동체통일방안 20주년을 맞는 지금부터라도 보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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