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진단 시리즈] 규제개혁 아직 멀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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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규제개혁위원회가 26일로 출범 한돌을 맞았다.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 중인 규제개혁 작업의 중간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6회에 걸쳐 현장을 총점검한다.

지난 19일 오전 10시 서울 강남구청 창구.

공무원 : "자동차 완성검사증이 없네요. 그것까지 준비해 다시 내세요. " 민원인 : "규제개혁으로 16일부터 그 서류는 필요없어졌잖아요. "

공무원 : "뭐라고요? 우리는 그런 사실 통보받은 적 없어요. 이대로는 등록이 안됩니다. "

민원인 : "관보를 확인해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

공무원 : (관보를 찾아보곤 겸연쩍은 표정으로) "아, 있구나…. "

자동차 영업사원 朴경훈 (33.가명.서울 대치동) 씨가 고객에게 판 자동차를 등록하러 구청을 찾았다가 담당 공무원과 주고받은 황당한 대화다.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무안하게 서류를 넘겨받은 담당자는 소유권 양도증을 보더니 다시 우겨대기 시작했다.

'양도 (출고) 일은 16일이지만 제작일은 6일' 인데 업무지침엔 제작일이 기준일로 돼있으니 역시 완성검사증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승강이 끝에 朴씨는 창구를 떠나 건설교통부 자동차관리과에 문의, "세금계산서 발행이 양도일 기준이므로 등록도 같은 기준" 이라는 답을 받았다.

같은 날 오후 1시쯤 구청을 다시 찾은 朴씨가 이 '유권해석' 을 전하며 접수를 거듭 청하자 직원은 朴씨가 알려준 전화번호로 건교부에 다시 확인한 뒤에야 등록증을 떼어줬다.

4시간30분만이었다.

朴씨는 "관련 업계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는 법규 변경을 정작 담당 공무원이 모른다" 며 분통을 터뜨렸다.

규제개혁이 겉돌고 있다.

정부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 생활하기 편한 나라' 를 만들겠다며 최대 역점정책으로 추진해온 규제개혁. 그동안의 실적을 수치 (전체 규제의 48.8% 폐지) 로만 보면 '획기적' 이거나 적어도 기반은 다져놓은 것으로 비친다.

그러나 본지 기획취재팀이 규제개혁위원회 출범 1주년을 맞아 전국을 취재한 결과 일반국민과 기업체의 규제완화 체감도 (體感度) 는 여전히 낮았다.

특히 ▶숫자 채우기식 규제완화 ▶무소불위의 창구지도 ▶공무원들의 과도한 재량권 행사 ▶새로운 규제 양산 등 지체와 역행의 징후가 곳곳에서 드러났다.

여기에 규제개혁과 맞물려야 할 행정조직 개편의 실패, 개혁의 발목을 잡는 집단이기주의, 아직도 버티고 있는 핵심.덩어리 규제까지 얽히고 설켜 개혁의 빛은 바래가고 있었다.

일선 창구에서부터 개혁은 실종된다.

행정자치부는 주유소 등에 실시하는 누설점검을 소방법 개정 전까지 유보토록 했지만 소방서들이 점검대상 업체에 유보안내문을 보내지 않아 서울시 등 5개 지역 84곳 주유소는 지난해 중복점검을 받아야 했다.

기업활동을 옭아매는 규제도 한 둘이 아니다.

현대자동차는 올해초 아산공장에서 EF쏘나타 (택시형) 생산에 앞서 '전문건설업체' 면허를 따야 했다.

LPG차량 제조승인 과정에서 한국가스안전공사가 그같은 주문을 했기 때문. 건설안전기본법 제11조와 시행령 제7조에 따라 LPG차량은 전문건설업 중 가스시설 시공업에 해당된다는 것이 공사측의 주장이었다.

현대자동차는 건설면허 없이 LPG차량을 만든 전례를 설명하고 "등록할 필요가 없다" 는 건교부 확인까지 받았으나 공사의 입장은 완강했다.

결국 현대는 면허를 따야 했고, 이에 따른 기술인력 채용과 관련 인허가 취득, 공과금 납부 등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동차를 만드는데 건설업 면허를 따야 하는 게 기업환경 개선이냐" 고 씁쓸해 했다.

규정조차 없는 창구지도도 여전하다.

외환위기가 끝난 요즘에도 시중은행들은 중소기업 대출현황.산업별 대출금 보고서.상업어음 할인취급 실적 등은 달마다, 기한부 수출환어음 담보대출 취급실적 보고서는 열흘 간격으로 한국은행에 내야 한다.

심지어 외국계 은행 국내지점들도 매일 각종 외환거래 실적을 한은에 보고한다.

유럽계 은행의 한 지점장은 "도대체 왜 이런 자료를 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며 혀를 내둘렀다.

그뿐 아니다.

퇴출은행을 인수한 은행들의 고용승계 문제가 현안이 된 지난해 7월 인사청탁이 밀려들자 금융당국의 어느 고위 인사는 청탁자를 엄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사실은 그 자신이 한 시중은행에 청탁을 해놓고 있었다고 한 인수은행의 임원은 실토했다.

외국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규제도 아직 많다.

한국 바스프 (BASF)가 지난해 대상그룹의 군산 라이신 공장을 인수한 뒤 대 표이사 명의를 변경할 때다.

보건복지부는 한국 BASF의 신임 맹가슨 사장에게 건강진단서를 요구했다.

식품위생법.약사법 해당 업체는 대표이사 명의변경때 진단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맹가슨은 "한국에서 사업하려면 건강해야 하나" 라며 어이없어했다고 한다.

정작 건강진단이 필요한 것은 규제개혁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기획취재팀 = 박의준.하지윤.왕희수.박장희.나현철.고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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