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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보균의 세상 탐사

평화의 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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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평화의 댐은 반전(反轉)의 드라마다. 댐에 얽힌 기억은 혼란스럽다. 그 우여곡절은 기구하다. 임진강 참사(경기도 연천)는 그 댐의 이력을 떠올린다. 댐은 북한강 상류 강원도 화천에 있다.

1986년 10월 5공 때다. 북한의 금강산댐(북한 명칭·임남 언제) 건설 계획이 알려졌다. 정부는 그것을 수공(水攻)용으로 파악했다. 금강산댐에서 쏟아진 물 폭탄이 여의도 63빌딩의 허리를 채우는 TV그래픽은 충격적이었다. 그 대응으로 금강산댐 36㎞ 아래 평화의 댐이 만들어진다. 6공 때인 89년 5월 1차 완공됐다.

지나침은 호들갑스럽기 마련이다. 본질을 잃고 의심을 낳는다. 전두환 정권은 민심과 멀어져 있었다. 평화의 댐은 과잉 위기감 조성, 정권 안보용이라는 불신을 샀다. 김영삼 정권의 감사원은 공식적으로 그런 낙인을 찍었다. 그리고 불쾌한 집단 기억으로 남았다.

망각과 의심 속에 첫 반전이 찾아왔다. 95년 집중 호우가 있었다. 평화의 댐은 홍수 조절용으로 작동했다. 새롭게 인식됐다. 2000년 10월 북한은 금강산댐의 1단계 공사(높이 88m)를 끝냈다.

대규모 반전은 김대중 정권 때 이루어졌다. 2002년 1월 금강산댐에서 엄청난 흙탕물이 쏟아졌다. 난데없는 겨울 홍수였다. 위성 카메라는 그 원인으로 금강산댐 상층부에 일부 균열과 훼손을 지목했다. 그 댐은 진흙과 자갈·돌로 쌓은 사력(沙礫)댐이다. 부실 공사의 흔적이 드러났다. 댐은 증축 공사 중이었다.

금강산댐은 그것으로 잠복된 공포로 등장했다. 수공 의도가 숨겨 있건, 허술한 공사 탓에 댐이 터지건 재앙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그쪽 주민들은 발 뻗고 잘 수 없게 되었다. DJ 정권은 극단적 사태에 대비했다. 그때까지 정권 핵심부는 평화의 댐을 불신과 무용론으로 대했다. 하지만 평화의 댐을 재평가했다. 댐의 자위적 존재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수공 위협의 과장 논란은 과거 문제였다. 남북한의 금강산댐 공동 조사 논의도 시원치 않았다.

정부는 2002년 9월 평화의 댐 증설에 들어갔다. 높이를 45m(125m·저수량 26억3000만t) 늘렸다. 북한은 역설적으로 평화의 댐을 새롭게 부활시켰다. 노무현 정권 때인 2005년 10월 증축공사를 끝냈다. 그 위용은 금강산댐(높이 121.5m, 26억2000만t)이 붕괴돼도 쏟아질 물을 감당할 수 있다. 금강산댐은 2003년 2월 2단계 준공됐다. 평화의 댐의 확장 착수나 준공 때 우리 정부는 조용했다.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이 때문에 평화의 댐의 변화와 재탄생을 제대로 아는 국민은 많지 않다.

진정한 반전은 이번 임진강 참사 때다. 북한은 새벽에 황강댐을 열어 4000만t을 남쪽으로 내려보냈다. 기습적인 무단 방류로 6명이 숨졌다. 국민적 분노는 커졌다. 다수 국민은 북한의 예측 불가능한 공격성과 도발적 체질을 실감했다.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때도 국민적 감정은 이런 형태로 표출되지 않았다. 황강댐의 대응 댐은 군남댐이다. 군남댐은 작다. 제2 평화의 댐 역할을 하려면 증축해야 한다는 여론은 단단하다. 이제 평화의 댐은 용도에 맞는 평판을 되찾았다. 북한 측의 무단 방류는 전략적으로 치명적 실패다.

평화의 댐은 거대하다. 댐과 어울린 주변 풍광은 절경이다. 그 주변에 평화공원이 있다. 햇볕정책을 내건 과거 정권부터 조성됐다. 커다란 평화의 종도 있다. 하지만 평화만을 외치는 분위기다. 평화는 기원만으로 확보할 수 없다.

평화의 댐에 담긴 장면들은 국가 방어의 교훈과 상상력을 준다. 안보는 냉정하고 차분하게 접근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적 열정과 참여를 끌어낸다. 안보에 과장과 축소를 하면 거부감을 사거나 애매해진다. 힘없는 평화는 썩기 마련이다. 평화는 무장된 평화여야 한다. 방어 역량과 의지를 키워야 평화는 살아 숨쉰다.

박보균 중앙일보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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