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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ㆍ요부일 뿐, 간신 이름은 못 붙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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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호 09면

조선 역사를 읽다 보면 새삼 “간신이 참 많았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한명회, 유자광, 윤원형, 김자점 등 굵직굵직한 간신이 시대별로 최소한 하나씩은 머리를 치켜든다. 여기에 ‘잔챙이’들, 그리고 다소 ‘억울한’ 간신들까지 치면 마치 범죄와의 전쟁을 외치는 나라에서 강력범죄가 끊이지 않듯 간신 척결을 외쳤던 나라가 오히려 간신들을 막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함규진의 조선 간신傳 <10> 정치에서 소외된 그들, 여자ㆍ내시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들기도 한다. 왜 이 간신들은 하나같이 남자일까? 그리고 극히 일부(가령 원균)를 제외하면 왜 다들 ‘양반 집안의 문관’들일까? 조선과 비슷한 체제였던 중국에는 예부터 환관 출신 간신이 많았다.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가 단 2대만에 무너지는 데 누구보다 책임이 컸다는 조고, 역시 2대만에 한나라 부흥의 꿈을 날려 버린 황호, 환관이면서 왕이라는 지위를 거머쥐었고 정치를 온통 어지럽혀 북송의 몰락을 재촉한 동관, 황제를 우습게 여길 만한 권세를 휘두르며 스스로를 “만세” 하나 아래인 “구천세”로 부르게 했다는 명나라 말기의 위충현···. 중국의 대표적인 간신들을 얼추 헤아려 보면 환관 출신이 절반에 육박한다.

이처럼 내시 간신이 많았던 까닭은 그들에게 권력이 돌아가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반 벼슬아치들이 들어올 수 없는 궁궐의 깊숙한 곳에도 환관의 발길은 거침없이 미친다. 황제는 물론 황후, 후궁들과도 수시로 대면할 수 있다. 왕권 강화를 꾀한 중국의 군주들은 믿을 만한 환관에게 은밀히 정보를 수집하고 관리들의 비리를 캐는 역할을 맡겼고, 때로는 대신들보다 더 큰 실권을 부여했다. 명나라 때는 황제가 ‘환관 내각’을 만들어 궁궐 깊숙한 곳에서 국정을 처리하며, 공식 내각을 허수아비로 만들기도 했다. 영락제의 명을 받들어 해외 원정에 나서서 멀리 아프리카까지 다녀온 정화 역시 환관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환관들은 그런 일을 꿈도 꿀 수 없었다. 고려조까지만 해도 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환관들은 조선조에 들어 궁궐의 하인 신세로 확실히 전락했다. 중국에 비해 훨씬 강력했던 문신 관료들은 환관에게 권력을 나눠 주는 일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을뿐더러 일종의 ‘인종차별’처럼 ‘불완전한 몸인’ 그들을 멸시하고 조롱했다. 여러 임금을 섬긴 늙은 환관도 새파랗게 젊은 관료 앞에서 감히 허리를 펼 수 없었다. 물론 약간의 농간을 부려 재물을 축적하는 예도 있었지만 ‘간신’이라고 불릴 건더기가 전혀 없는 사소한 비리였을 뿐이다.

연산군은 조선왕조의 원리원칙을 거의 전부 거꾸로 뒤집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조차 환관을 천대하는 방침만은 뒤집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환관을 매질하고 괴롭히는 일을 일종의 ‘취미 생활’로 여겼다. 연산군과 관련해 환관 한 사람은 간신은커녕 바른 말을 하는 충신으로서 이름을 남겼다. 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하고, 그 대가로 사지를 베인 뒤 짐승의 먹이로 던져졌다는 김처선이다.

세계 역사에 보기 드물 정도로 환관의 힘이 철저히 억제된 반면 천리마 꼬리에 날파리처럼 달라붙어 한때 세상을 쥐고 흔들었던 여성의 예는 조선에도 많다. 연산군의 장녹수, 윤원형의 정난정, 광해군의 김개시 등은 숙종대의 장희빈과 함께 사극에 단골로 등장한다. 사도세자와 정조의 비극 뒤에는 화완옹주와 문숙의가 있다. 또 나라가 위태로워진 조선 말에는 특히 ‘여자 간신’의 이야기가 많다.

명성황후가 임오군란으로 충주에 피해 있을 때 환궁할 날짜를 맞힌 인연으로 입궁한 진령군이라는 무녀는 관성제군(관우)의 딸이라 자처하며 명성의 총애를 무기로 벼슬을 팔고 공금을 횡령하는 등 온갖 비리를 다 저질렀다 한다. 당시 궁궐에는 ‘천하장안(天下長安)’이 버티고 있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천(千)씨, 하(河)씨, 장(張)씨, 안(安)씨 성의 네 상궁을 가리키는 천하장안이란, 이들 상궁의 힘이 워낙 막강해 그녀들을 거치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다소 과장과 헛소문이 섞여 있을지 모르나, 민심이 흉흉하고 앞날이 아득할수록 집권자의 약해진 마음을 노리고 꼬여 드는 교활한 무리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녀들을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그녀들에게 간신이라는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한 나라에 사는 사람으로 임금 외에는 모두 신하(臣)인 법이니 간신이라 부를 만도 하련만 여성은 근본적으로 정치와는 별개의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고 여겨졌기에 그녀들은 단지 요녀, 음녀, 악녀라 불릴 뿐 간신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간신이란 공적 영역에서 발생한 부정적 존재이니 관념상 공적 영역과는 동떨어진 여성들은 충신도, 간신도 될 수 없었다. 왕후에서 여염집 아낙까지 그들은 남편에게 부속된 존재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의 여성은 일부 재능과 신분이 뛰어난 이조차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실제로는 왕비나 후궁의 ‘베갯머리 송사’ 덕분에 현명한 판단을 내리곤 했던 무능한 임금도 적지 않았던 듯하나 그녀들의 공헌은 그 누구도 평가해 주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는 어린 임금이 즉위했을 때 당분간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관례였지만 이 경우에도 대비는 “나는 어리석은 여인네로 나랏일은 아는 것이 없으니···” 하는 말을 앞세우며 원로대신이나 친정의 외척들에게 의지해야 했다. 그래서 간신들의 버팀목이 되어 주는 데 그쳤을 뿐 스스로 정치의 중심이 되어 뜻대로 세상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이 한계를 넘어 보았던 극소수의 여성, 가령 문정왕후와 명성황후의 경우 온갖 비난을 들으며 있는 소문, 없는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간신은 측근정치라는 온상에서 피는 독버섯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환관과 비빈의 권력 확보를 철저히 차단한 조선의 정치는 바람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왕권이 미약했음을 의미한다. 자기 주변에 밤이고 낮이고 자신을 도와줄 심복을 둘 수 없었던 왕들은 궁궐 밖에서 벌어지는 당파 활동과 역모에 힘을 쓸 수 없었다.

최근 나온 정조의 간찰에서도 드러나듯 왕은 일신의 안전을 확보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적대적인 당파의 영수와도 긴밀히 연락하며 간곡히 구슬려야 했다. 환관들이 중심이 된 ‘동창’을 통해 고위 관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그들의 약점을 하나하나 손에 쥘 수 있었던 명나라 황제들과는 전혀 딴판인 조선 임금들이었다. 부부가 나란히 국정에 참여하며 권력을 공유했던 유럽이나 신라, 고려 군주들의 모습 역시 꿈도 못 꾸었다.

중앙권력이 지나치게 강하면 독재의 폐단이 생기지만 지나치게 약해도 국가기강이 무너지고 권세가들이 날뛰는 세상이 된다. 그리고 환관도, 여성도, 상민(常民)도, 그리고 양반 중에서 무반들조차 배제하고 그들만의 리그에서 충신과 간신을 논했던 조선의 사대부 관료들. 그런 편협함과 폐쇄성이야말로 나라의 힘과 정당성을 길이 갉아먹는 폐단이 아니었을까.


성균관대 정치학 박사로 현재 성균관대 부설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 『정약용 정치사상의 재조명』『왕의 투쟁』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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