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때 연금 지킨 걸로 역할 다해” … 박해춘 국민연금이사장 사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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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춘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11일 보건복지가족부를 방문해 전재희 장관에게 사표를 낸 뒤 밖으로 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연금공단 박해춘 이사장이 전격적으로 사퇴했다. 박 이사장은 10일 보건복지가족부 전재희 장관에게 구두로 사퇴 의사를 전달한 뒤 11일 장관실을 찾아 직접 사표를 제출했다. 지난해 6월 취임 이후 1년3개월 만의 자진 사퇴다. 복지부는 박 이사장의 사표를 수리하고 곧 후임 이사장을 공모할 계획이다.

박 이사장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전 세계 주요 연기금이 평균 20%의 손실을 보는 와중에 국민연금을 큰 손실 없이(-0.18%) 지켰고, 내부 개혁도 어느 정도 한 만큼 누가 후임자로 오더라도 잘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고 말했다.

금융위원회가 9일 박 이사장이 우리은행장으로 재직할 당시 투자자산 사후관리 부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 ‘주의적 경고’를 내리자 그가 사퇴 압력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박 이사장은 이를 부인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임기가 1년9개월 남았는데 왜 지금 사퇴하나.

“오래전부터 고향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맘을 먹고 있었다. 금융 인생 34년 중 12년을 서울보증보험과 LG카드 등 파산 금융회사를 살리는 데 바치면서 단 하루도 제대로 못 쉬었다. 실력이든 운이든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에 국민의 노후자산 250조원을 지켜낸 것만으로도 국민연금 이사장으로서 내 역할은 다 했다고 본다. ”

-사퇴 전 청와대와 사전 교감 있었나.

“10일 전 장관에게 처음으로 사퇴 의사를 밝혔다. 난 TK(대구·경북)도 K대(고려대) 출신도 아니다. 종교도 대통령과 다르다. 이명박 대통령이 오직 내 실력 하나만 보고 국민연금을 개혁하라는 미션을 줘 이 자리에 왔다. 그런데 우연히 금융위기가 닥쳤고 금융회사에서의 경험을 살려 국민연금을 지킬 수 있었다. 지난해 전 세계 주요 연기금이 6800조원을 까먹는 동안 국민연금은 4270억원 손실로 막았다. 올해 6월 현재 7.23%의 수익률(12조5000억원)을 올릴 정도로 기금 운용이 정상을 되찾았다. 물론 시장 상황을 더 지켜봐야 하지만 올해는 24조원가량의 이익이 날 것으로 본다. 대통령이 주문했던 국민연금 내부 개혁도 어느 정도 이뤘다고 자부한다. 처음엔 반발했던 노조도 나중엔 오히려 나를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전 장관과 불화설이 있었는데.

“국민연금 이사장이란 자리가 (장관한테) 작은 점수 따서 되는 게 아니라 국민에게 실적과 성과를 보여 줘야 하는 어려운 자리더라. 지난해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국민연금이 전 세계에서 수익률 1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현장에서 많이 뛰기도 했지만 그보다 전 장관의 전폭적인 정책적 지원 덕분에 가능했다. 1년에 서너 차례 열리던 기금운용위원회를 장관이 수시로 열어 신속한 의사 결정을 가능하게 해 줬다. ‘미네르바’가 코스피지수가 500포인트까지 고꾸라진다며 투자자들을 공포로 몰고 갈 때도 증시 버팀목이 된 게 바로 국민연금 아니었나.”

-우리은행장 재직 시절 파생상품 투자 실패에 따른 책임으로 금융위로부터 ‘주의적 경고’를 받았는데.

“솔직히 억울하다. 전임자인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이 투자한 4건의 부채담보부증권(CDO)과 크레디트디폴트스와프(CDS)는 한마디로 ‘하자 상품’이더라. 아예 유통이 안 돼 손절매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부실 상품인데 ‘리스크 관리 시스템이 왜 제대로 작동을 안 했느냐’ ‘왜 좀 더 실력 있는 사람이 관리하게 하지 않았느냐’고 말하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퇴 후 뭘 할 건가.

“고향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 사실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일이다. 이를 위해 지금까지 늘 독하게 마음먹고 자기 관리를 해 왔다. 이사장 월급은 680만원이 전부다. 은행장 시절의 12분의 1밖에 안 된다. 그러나 연간 판공비(1억4000만원)를 한 푼도 안 쓰고 모두 일선 부서가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박 이사장은 충남 금산 출신으로 대전고-연세대 수학과를 나왔다. 삼성화재 상무를 거쳐 외환위기 직후 파산 위기에 몰렸던 서울보증보험을 2003년 2435억원의 흑자 기업으로, 이어 2004년 9조원의 부실자산을 안고 있던 LG카드를 1년 만에 흑자 기업으로 전환시켜 부실 금융기업의 해결사란 평가를 받았다. 1988년 연금공단 설립 이후 처음으로 관료 출신이 아닌 민간 전문가로 이사장이 됐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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