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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 할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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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달 8·15 경축사에서 언급한 사람 이름은 모두 4명이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과 개화파 유길준, 김만덕 할머니 그리고 추사 김정희다. 일반인에게 생소한 ‘김만덕’이란 인물을 대통령이 중요한 기념식장에서 거론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안 그래도 사표(師表)가 될 만한 인물이 적은 데다 사표감으로 떠오를 만하면 어떻게든 모질게 흠집 내 꺾어버리는 우리 풍토에서, 국정 최고책임자가 사람을 발굴하고 알리기에 일조한 게 반갑다. 김만덕(1739~1812)은 제주도의 여성 거상(巨商)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12세 때 부모를 잃고 관기(官妓)에게 몸을 의탁했다. 자라서 기생이 돼 ‘앞 이마엔 해님이요, 뒤 이마엔 달님이요, 두 어깨엔 금 샛별이 송송히 박힌 듯한’ 자태로 남성들의 애를 태웠다. 그러나 유혹을 뿌리치고 근검 절약해 돈을 모은 끝에 기생 신분을 벗어났다. 객주를 차려 요새로 치면 유통업과 숙박업을 겸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클라이맥스는 그 다음이다. 1790년대 초반 제주도에 극심한 흉년이 들자 사재 천금을 들여 양곡 500석을 구입해 무수한 제주도민을 죽음에서 건져냈다. 정조 임금이 소식을 듣고 서울로 불러들여 소원을 묻자 김만덕은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다”고 대답해 꿈을 이룬다. 채제공·이가환 등 당대의 명사들이 시와 전기를 지어 그녀를 칭송했고, 제주도에 유배 온 김정희도 “은혜의 빛이 세상에 넘친다(恩光衍世)”고 기렸다.

김만덕 사후 36년, 평양의 가난한 농민 집에서 외동딸 백선행(1848~1933)이 태어났다. 아버지가 7세 때 죽자 모친은 청상과부가 됐다. 백선행은 14세 때 농민에게 시집갔지만 불과 2년 만에 남편이 병사했다. 청상과부 모녀는 간장 장사·베 짜기 등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생활신조는 ‘먹기 싫은 것 먹고, 입기 싫은 옷 입고, 하기 싫은 일 하고’였다. 25세 때 모친마저 세상을 떴다. 이를 악물고 일에 전념했다. 돈 많은 과부집을 노리고 침범한 강도들에게 저항하다 몸 여러 군데 흉터도 생겼다. 그녀는 1908년 환갑을 맞아 첫 선행을 편다. 서울에서 석공을 불러와 마을의 다 쓰러져가는 나무 다리를 헐고 돌다리를 지어 준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더 이상 ‘백과부’라 낮춰 부르지 못했다. ‘선행(先行)’이라 이름 짓고 다리는 ‘백선교’라 칭했다.

돌다리는 시작에 불과했다. 백선행 할머니는 감리교 선교사가 세운 광성보통학교, 장로교 계통의 숭현여학교, 창덕보통학교, 숭인상업학교 등에 현금·토지를 잇따라 기부해 조선을 대표하는 여성 사회사업가로 떠올랐다. 총 기부액은 31만6000여원, 요즘 가치로 316억원에 해당한다. 그즈음 경상북도에서는 김천고등보통학교(현 김천고)가 개교했다. 1931년이었다. 대구고보(현 경북고)에 이어 경북 지역에서 두 번째, 사립으로는 첫 번째 중등교육기관이었다. 김천 출신의 최송설당(1855~1939) 할머니가 평생 모은 재산 32만7000원을 기부한 덕에 설립될 수 있었다. 최 할머니는 한시 258수, 가사 50편을 남긴 조선의 마지막 여류 시인이기도 했다(전봉관 저 『럭키경성』·살림).

조선 후기에서 일제시대에 걸친 국운 쇠망기. 기득권을 쥔 남성들이 나라를 서서히 말아먹던 시기여서 세 여성의 활약이 더욱 돋보인다. 하나같이 악조건을 딛고 일어나 거만(巨萬)의 부를 일구었다. 그 부를 아낌없이 베풀고 떠났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엣지 있는 삶의 극치’ 아닐까. 나는 이 분들의 DNA가 오늘날 ‘김밥 할머니’ ‘국밥집 할머니’들의 눈물 나는 기부 행위로 이어진 게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마침 유엔이 정한 ‘세계 빈곤 퇴치의 날’인 10월 17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김만덕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김만덕 나눔의 쌀 1만 섬 쌓기’ 행사가 열린다. 기부받은 쌀은 무료급식소·복지관·소년소녀가장 등에 전달할 계획이다. 신종 플루와 반대로 ‘기부 바이러스’는 많이, 널리 퍼질수록 좋은 법이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