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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텔레비전] 교육방송의 '음악다큐'를 보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오랫동안 내 귀는 막혀있었다. 내 속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느라, 바깥 세계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옛날엔, 방송을 듣다 클래식 음악이 나오면 아, 지루해! 하면서 주저없이 채널을 돌렸다.

그런 내가 요즘 교육방송의 음악다큐에 푹 빠져 매주 화요일 저녁8시만 되면 텔레비전 앞에 몸을 대령한다. 8시면 공교롭게도 나의 저녁식사 준비시간과 일치해 처음엔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느라 괜히 바빴다.

즉 귀로는 방송을 들으며 손으론 설거지를 하거나 음식을 만들었다. 그러나 곧 나는 하나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는데 음악에 집중하기 위해 밥 먹는 걸 뒤로 미루게 된 것이다.

서양의 고전음악처럼 부르조아적인 예술도 없을 것이다. 문학이나 미술을 이해하고 감상하는데는 - 의지만 있다면 - 그다지 큰 돈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클래식은 다르다. 음반이나 CD를 대여해주는 도서관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게다가 괜찮은 음악회 표값은 또 얼마나 비싼가. 고백하건대, 내 돈 내고 콘서트에 가 본 기억이 없는 나는 세종문화회관 앞을 지날 때마다 야릇한 감정의 혼란을 겪는다.

무식하게 크기만 하군! 비웃다가도 거대한 석조물로 상징되는 자본과 권력의 힘에 기가 죽는다. 지식과 기술은 물론 예술과 교양까지도 살 수 있는 위대한 돈. 그러나 나의 양심만은 사지 못할걸, 자부하며 위안을 얻곤 한다.

그런 내가 지금, '바흐에서 바르톨리까지' 의 열렬한 팬이 되어 비로소 귀가 열리고 새로운 세계를 배우는 즐거움에 가슴이 설렌다.

그러나 나를 열광시키는 것은 음악 그 자체보다는 개개의 음악가들이며, 인생과 예술에 대한 그들의 빛나는 통찰이다.

베토벤의 영웅교향곡이 아니라 그 뒷얘기가 나를 매혹한다. 이 곡은 원래 나폴레옹에게 바쳐질 예정이었는데, 나중에 그가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배신감을 느낀 베토벤은 악보의 첫머리에 쓰여진 '나폴레옹에게' 라는 헌사를 어찌나 격렬하게 지웠던지 종이가 뚫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가벼운 줄로만 알았던 모차르트를 다시 보게 된 것도 이 프로그램의 덕이다. "황량한 느낌을 주는 단조 소나타를 이해하려면 벼랑 끝까지 내몰렸던 한 인간의 격정을 알아야 합니다. " "정직이라구요? 오 -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지요. " 마리아 칼라스의 육성 고백이 가슴을 찔렀다.

작품에 숨겨진 심리적 요소뿐 아니라 당대의 사회 분위기와 음악 수용자층의 변화 등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이 다큐멘터리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자유의 문제이리라. 졸속제작에다 틀에 박힌 포즈와 준비된 대답만을 강요하는 작위적인 연출이 지배적인 한국에서는, 어떤 장면들은 설령 찍었어도 방영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예컨대 이탈리아의 젊은 성악가인 바르톨리가 어머니와 함께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은 뒤 "먹는 것도 중요하잖아요?" 라고 카메라를 향해 허리가 휘어지도록 깔깔 웃는 모습이나, 자연스레 어깨를 긁는 부분은 편집으로 잘려나갔을지도 모른다.

이제 음악의 몸을 빈 은유와 추상의 세계에 몰입할 여유가 생겼으니, 세상만사 골치아픈 일들일랑 모두 잊고 바흐의 무반주첼로조곡을 듣고 싶다. 이 정도의 사치는 이제 내게 허락된 게 아닐까? 그나저나 오디오를 하나 사야겠는데, 그놈의 밀린 원고료는 언제 나올까.

나의 쓸쓸한 저녁시간을 덜 쓸쓸하게 해준 제작진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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