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프로바둑계 '신예들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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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프로바둑계가 고단자 수난시대를 지나 저단자 전성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한국기원이 29일 발표한 3월까지의 성적표를 보면 다승랭킹 20위 안에 든 고단자는 이창호9단과 조훈현9단 2명 뿐이고 나머지 18명은 모두 5단이하의 저단진이 차지했다. 물론 6단이상의 고단자와 5단 이하의 저단자를 단순비교하긴 어렵다.

국내 프로기전에서 저단진은 1차예선, 고단진은 2차예선부터 출전하는데 2차가 1차보다 어려운게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기원은 올해부터 모든 통계에서 지난 50년간 고수해온 고단자와 저단자의 구별을 없앴다. 소년강자들이 바글거리는 1차예선이 노장들이 많은 2차예선보다 결코 쉽지 않다는 분석에 따라 사상 처음으로 단위와 관계없이 통합전적을 발표한 것이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이창호9단은 14승1패로 여전히 다승1위. 승률도 물론 최고다. 그는 국내기사들에겐 전승을 거두었고 오직 중국의 마샤오춘9단에게만 1패를 당했다.

조훈현9단도 11승1패로 건재를 과시하며 다승9위를 유지했다. 그는 아직까지 이창호와 도전기를 한번도 치르지 않은 탓에 패배라고는 최고위전에서 안조영5단에게 당한 1패가 전부다.

하지만 나머지 고단자들은 이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유창혁9단은 새해들어 7연승을 달리다가 1패했고 회복세의 서봉수9단도 7승2패). 95년도 신인왕 김성룡5단은 군대에서 제대한 뒤 페이스를 되찾아 15승3패로 2위를 달리고 있고 상승세의 김만수4단이 3위. 강지성2단, 이희성2단등 생소한 이름의 소년들이 4, 5위를 차지했다.

여류기사중 최고의 유망주로 손꼽혀온 박지은 (16) 초단이 10승3패를 거두며 당당 14위에 오른 것도 바둑계에선 매우 특별한 사건에 속한다. 박초단은 10승중 9승을 남자기사에게서 올렸는데 '희생자' 중엔 놀랍게도 서봉수9단도 끼어 있다. 박초단은 KBS바둑왕전 2차예선에서 서9단을 꺾고 결승까지 진출했으나 유창혁9단에게 졌다.

갓 프로가 된 박병규초단과 윤혁초단도 각각 13, 18위에 올라있다. 대신 신예유망주로 최고의 기대를 모으고 있는 이세돌2단과 최철한2단은 각각 7승6패와 4승4패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들 소년 저단진들은 서능욱9단. 장수영9단. 강훈9단. 김수장9단. 최규병9단등 강자들을 수시로 격파하며 실력을 과시하고 있지만 자기들 끼리의 경쟁이 치열해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다.

'이사람이 이창호의 후계자' 라고 할만한 기사는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초단은 수졸 (手拙) , 2단은 약우 (若愚) , 3단은 투력 (鬪力) , 4단은 소교 (小巧) , 5단은 용지 (用知) , 6단은 유현 (幽玄) , 7단은 구체 (具體) , 8단은 좌조 (坐照) , 9단은 입신 (入神) .그 별칭에서 보듯 수졸과 입신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었다.

그러나 국내 18명의 입신을 포함, 63명의 고단자중 단 2명만이 다승랭킹에 낀 사실은 고단자들이 대국수가 적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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