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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판, 징하요(1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18) 코미디에도 손대

내 두번째 작품은 '전쟁과 노인' (63년) 이다.

그런대로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제작자의 간섭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 내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한 영화다.

대영영화사 제작으로 최무룡.김혜정.김승호.신영균 등이 출연한 전쟁영화였다.

어느 최전방의 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국군 일개 소대가 통신두절로 완전히 고립되지만, 인근 마을 한 노인의 식량조달 덕에 용기백배해 끝까지 고지를 사수한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을 찍을 무렵 북한의 비난 방송이 있었다고 한다.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 (63년) 과 함께 국민들에게 전쟁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이 영화를 찍었다.

전쟁영화는 지난 날 고통받은 내 삶에 대한 항변이기도 했다.

지금도 나는 조건만 갖춰지면 만들고 싶은 것이 전쟁영화다.

그러나 전쟁영화를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장비 일체를 군에서 지원 받아야 하는 등 우선 갖춰져야할 제반 조건들이 필요하다.

나는 이 작품을 만들면서 장석준 촬영기사의 도움을 참 많이 받았다.

지금 생각해도 탁월한 촬영 감각의 소유자란 생각이 든다.

뛰어나게 수려한 화면을 구사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정확히 카메라 안에 잡아내는 능력은 대단했다.

작품분석을 하며 나는 장기사와 다툰 적이 단 한번도 없을 만큼 마음이 잘 통했다.

재작년 타계한 유영길 촬영감독 등이 다 그 밑에서 수련을 쌓았다.

액션과 전쟁물에 이어 나는 코미디에도 손을 댔다.

세번째 작품 '남자는 안 팔려' (63년.대원영화사 제작) 다.

네번째 작품이 사극 (史劇) 이었으니 데뷔 초창기 나는 안해본 장르가 없을 정도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영화를 찍어 댔다.

'남자는 안 팔려' 는 배우가 되겠다며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두 청년의 이야기다.

우선 식생활을 해결하기 위해 두 청년은 직장을 구해보려 하나 어딜가도 여자만 모집한다는 광고뿐. 급기야 여장 (女裝) 을 하고 이들이 여성국극단에 입단한다는 희극이었다.

구봉서.이대엽.최지희 등이 출연했다.

내가 이처럼 초창기 상반된 장르에 도전한 데에는 나름대로 구실이 있긴 했다.

"어차피 영화에 대해 잘 모르니 두루두루 맛보자" 는 생각이 첫번째 이유였다.

아울러 내 적성이 어디에 맞을지 가늠해 보자는 실험정신도 없지 않았다.

그런 다양한 실험에서 코미디는 일단 실패였다.

몇년 뒤 '신세좀 지자구요' (69년) 도 찍긴 했지만 초기 몇편을 제외하고 나는 코미디에서 영영 손을 떼고 말았다.

60년대 초반은 액션물과 사극.코미디의 전성기였다.

이같은 대세에 부화뇌동은 했지만 엎치락 뒤치락하는 슬랩스틱류의 상황설정이 영 연출가로서의 양심과 갈등하는 부분이었다.

네번째 작품 '망부석' (63년) 은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비참한 최후와 정조 대왕의 등극을 그린 사극. 당시 사극은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이 주도하던 시절이었다.

다른 영화사에서 사극을 한다는게 만용으로 비칠만큼 신필름의 위세는 대단했다.

다른 영화사 작품으로 흥행에 성공한 것은 정창화 감독의 '장희빈' 정도였다.

이런 신필름의 성가에 도전장을 낸 곳은 극동흥업이었다.

당시 신필름에서는 '강화도령' 이라는 사극을 기획중이었는데 극동흥업은 나를 내세워 겁없이 아성에 도전장을 낸 것이다.

졸지에 이 작품에 내가 발탁된 것은 앞서 만든 세 작품이 그런대로 흥행에 성공, 제작자의 신뢰를 산 까닭이다.

나는 이 작품을 하면서 사극이란 장르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조선 (朝鮮) 적이라고 할까. 유교적인 윤리가 갖는 범절, 그 속에 있는 아름다움 같은 것을 찾아내고 싶어졌다.

글= 임권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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