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정당과 국회는 제역할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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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해방 이후 우리 경제가 가장 큰 제도개혁을 한 것은 60년대 초반 수출지향적 산업정책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정부조직 및 각종 제도의 개편이었다.

이러한 개혁은 당시 기득권 집단의 형성이 미미했고 군사독재라는 정치상황이 빈곤과 실업에 찌들린 국민들의 경제개발에 대한 공감대 형성과 더불어 가능하게 되었으며, 이는 향후 30년간 경제번영을 이룰 수 있게 한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IMF 위기라고 부른 이번 경제위기는 그때와 같이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제도의 개혁을 낳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현재 정치상황은 그때와 같이 지도자나 엘리트의 비전과 식견에 의해 개혁이 추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와 더불어 각 이해집단의 갈등과 이익을 조정할 수 있는 정치제도와 문화가 갖춰져야만 가능하게 되었다.

우리가 외환위기를 맞게 된 것은 우리의 제도와 정책이 낡았고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민주화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우리경제의 건전성과 차세대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 국가 정책결정을 할 수 있는 정치제도와 토양을 마련하지 못했고 정치지도자들의 식견과 비전이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이후 금융시장지표가 안정되고 경제가 다소의 회복조짐을 보이는 것은 우리나라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미국의 세차례 금리인하와 IMF지원에 의해 러시아.브라질의 외환위기가 일단 진정되고 달러화의 약세 반전에 따라 동아시아국가들의 환율이 전반적으로 다시 절상되고 국내 금리가 인하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주식시장이 활기를 찾게 되고 소비심리가 회복돼 산업생산의 증가를 가져오게 된 것은 태국.말레이시아.필리핀 등 동아시아지역과 일부 남미국가들의 거의 공통된 현상이다.

지금 우리는 경제회복을 자축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지난 1년 동안 제도개혁과 구조조정이라는 절실한 과제를 푸는데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앞으로 지속적인 구조조정을 위해 필요한 국민적 공감대를 지켜나가는 노력을 해야 할 때다.

IMF나 세계은행은 이미 우리에게 차관을 거의 다 내어 준 상황이어서 우리 경제개혁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상실하였다.

외환보유액 증대로 국제 금융시장의 경제개혁에 대한 압력도 줄어들고 있다.

우리 스스로 구조조정과 제도개혁에 대한 채찍질을 가하지 않으면 그나마도 시작한 각종 제도개선과 구조조정은 곧 유야무야될 가능성이 크다.

위기 이후 지금까지 우리 경제에서 가장 큰 승자가 된 것은 바로 5대 재벌과 이들 재벌노조의 근로자들이 아닌가.

5대 재벌은 부실기업을 인수해 그들의 시장점유율을 더 늘리게 되었고 이들 재벌의 근로자는 과잉투자와 기업부실화에도 불구하고 많은 중소기업들의 근로자와 달리 극소수만이 직장을 잃게 됐으며 최근에는 급증하고 있는 전체 실업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실질임금은 오히려 오르고 있는 실정이다.

경제위기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소리없이 직장을 잃은 수많은 근로자와 부실처리비용을 떠맡게 된 납세자,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고도 직장을 얻을 수 없게 된 젊은이들이며, 우리 경제회복이 지연될수록 이들의 피해는 더욱 커질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한다고 하면서도 민주주의의 성공을 위해 꼭 필요한 제도들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모든 국민의 이해와 의견을 절충하고 골고루 반영할 수 있는 정당제도와 의회 민주주의가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정당은 지역성과 인물중심으로 좌우되고 있어 중소기업이나 일반 근로자, 그리고 중산층의 이해를 대변하고 이를 의회토론을 통해 국가 정책결정에 반영하는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그 결과 가장 잘 조직되고 큰 목소리를 내는 이해집단의 이익만이 주로 반영되는 국가경영이 돼 왔다.

노동개혁.재벌개혁.금융개혁 등 기득권층의 이익과 상반되는 개혁이나 구조조정은 쉽게 좌절됐으며 이제 장래 납세자들이 여기서 비롯되는 부실의 부담을 지게 됐다.

지금도 우리 경제의 고질적인 문제점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이는 향후 계속해 우리 경제의 진정한 회복을 지연시킬 것이다.

노동시장의 경직성 지속은 이제는 단순히 기업가와 근로자간의 이익분배 문제가 아니라 직장을 가지고 있는 자와 직장을 잃고 새 직장을 구해야 하는 자간의,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납세자들과의 소득 재분배를 초래하게 된다.

지금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지도자와 정당들은 경제위기의 와중에서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제대로 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과 차세대의 권익도 경제 정책결정에 충분히 반영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만약 우리의 정당들이 지금과 같이 공천자의 눈치나 보고 지역 패권주의에 얽매여 있으면서 정치지도자들이 단기적 입지확보에 집착해 있다면 우리에게는 오직 기득권을 갖고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는 집단들의 이익만이 보호되는 절름발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있을 뿐이다.

조윤제 서강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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